80년대생 남녀가 만나 결혼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아버지는 50년대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아오셨다. 어린 시절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세상을 배웠고, 군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도 조용히 응하는 법을 배웠으며, 블루칼라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스스로 결혼자금을 마련했다. 요리 잘하고 착한 여자와 결혼하여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아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갖췄다. 60대 중반이 넘은 현재까지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으며, 이런 말을 자주 입에 담고 산다.
“고추도 없는 것들이 아비가 하라면 그냥 하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우리 집에는 아버지 표현대로 쓰자면 무(無) 고추 3명과 유(有) 고추 2명이 있다. 언니와 나는 고추가 없이 태어난 죄로 평생을 무 고추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으로 불렸다. 언니는 무 고추 1, 나는 무 고추 2. 어릴 때는 정말 내 이름이 ‘주리’가 아니라 ‘무 고추 2’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아버지는 내 이름 대신 이 해괴망측한 이름을 불렀다. ‘무 고추’라는 이름에는 아버지의 결코 이룰 수 없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본인이 평생을 일궈 온 일을 자신의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넘겨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아쉬움. 무 고추 1과 무 고추 2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었고, 깜량도 되지 못했다. 내 밑으로 유 고추도 하나 있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는 장애가 있어서 일을 이어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무 고추 2’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그의 등 뒤에 서린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낀다. ‘아들이 있어야 했는데, 아들이 있어야 했는데..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지금과는 다를 텐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정의 분위기가 평생토록 차별과 억압으로 일그러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무 고추 2’라고 불렀지만 실제로 아들과 차별을 두고 키우지는 않았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게 해 주었고, 더 넓은 세상에서 살라며 등을 떠밀기도 했다. 우리 집의 예시는 좀 극단적이지만, 8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대부분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 여자라고 대학에 못 가는 일은 없었다. 공부를 못 해서 대학에 못 갔을지언정 여자니까, 누나니까 다른 형제들을 위해 공부를 포기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다. 하지만 생활 속 미묘한 차별이 존재했다. “오빠 라면 좀 끓여줘라”라는 엄마의 말을 들어보지 않은 여동생이 있을까? 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다른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그렇게 자란 여성들은 어느새 ‘엄마’와 ‘부인’이 됐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됨으로써 가부장제의 법적 효력은 사라졌지만 여성들의 마음속에는 피할 수 없는 가부장제의 그늘이 서려있다. 떨쳐내려 발버둥 치고 죽어라 노력해도 벗어나기 힘든 이 무서운 가부장제의 그늘.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조금 시도하다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여성 개인의 탓이 아니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느끼도록 세뇌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가부장제의 그늘 속에서 여성들은 매일 참고 또 참으며 스스로를 탓했다. 이 그늘은 가장 평등해야 할 부부관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찌나 짠한지, 가만히 듣다 보면 그 남편들은 모두 팔이나 다리 하나가 없어서 집안일을 제대로 못하나 싶을 정도다(우스갯소리지만 내 남편은 진짜 팔, 다리가 하나씩인데도 나보다 집안일을 훨씬 잘한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일 하나도 안 해봤대.
그거 하나하나 다 가리키느니
그냥 내가 하는 게 속 편해.
그게 더 빨라.’
해 놓은 꼴도 맘에 안 들어.
결국 내가 다시 해야 해.
일거리만 두 배로 늘어난다니까?
정말 그럴까? 남성들은 태생적으로 집안일을 잘 못 하도록 만들어졌을까? 설거지 후에 물이 튄 주방 바닥이 남성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그들의 시야가 바닥까지 닿지 않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인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진심으로?
그래도 애는 엄마가 봐야지.
애도 엄마를 더 좋아해.
아빠들은 딱 시킨 것만 해.
애 좀 봐 라고 하면 진짜
바라만 보고 있다니까?
웃겨 정말.
아이가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아빠들은 왜 아이를 두 눈으로 지긋이 바라만 보는 걸까. 남성의 DNA에는 ‘육아’ 기술이 여성보다 현저하게 적게 탑재되어 있을까? 자,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생각해보자. 당신도 처음부터 완벽한 엄마는 아니었다. 모두 지난 시간의 피땀 눈물로 일궈 낸 ‘엄마 되기’의 결과일 뿐이다. 아빠들이 육아를 잘 못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1. 지금까지 안 해 본 일이라서.
2. 자신이 안 해도 부인이 알아서 다 잘하니까.
3. 밖에서 일하느라 바빠서
부부관계와 양육에 있어서 ‘뼈속 깊이 남아있는 가부장제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역할을 바꿔서 해 보면 된다. 남편이 주양육자와 전업주부가 되면 된다. 그 실험을 함께 시작해보자!
(맞벌이 부부의 경우, 남편이 주양육자가 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