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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Jul 05. 2024

이러다 죽겠네

버킷리스트 한 줄을 지우며

숲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다르다. 해가 뜨거운 여름이지만 나무가 주는 그늘과 바람은 청량함으로 표현하고 싶다.


세 번째 도전만에 성공한 숲에서 책 읽기.

그전에 숲을 유유히 걸으며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유유히. 걷다 보니 나는 또 경보를 하고 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평소 뭐가 그리 바쁜지 걸음걸이가 남들 반쯤 뛰는 듯 빠르다. 나의 지나온 세월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살았음을 반증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천. 천. 히


가끔씩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감탄사를 연발한다.

사려니숲은 그런 곳이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 외부의 유해한 것들을 철저히 차단하고 온전히 너의 숨에 집중하라 말한다.


둘레길의 끝자락에서 내가 딱 원하는 곳을 발견했다. 비 온 뒤라 나무의자에는 약간의 습기가 남아있었지만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대충 먼지를 털어내고 몸을 누인다. 큰 나무 사이로 아침해살이 끼어든다. 행복하다.


대단하지 않은 이런 소소함에 감사하는 내가 좋다.

이런 작은 감사들이 켜켜이 쌓이면 내 속의 우울들은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을 잃고 나를 떠나 주리라 믿는다.


책과 생수병을 꺼낸다.

물 한 모금이 참 달다.

팔을 쭉 뻗어 하늘을 향해 뻗고 책을 읽어 내려간다.


<미술가 정진 c의 아무런 하루  >

문장은 간결하지만 행간이 많은 말을 한다. 감탄이 절로 난다.


30분쯤 지났을까?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모기떼가 나를 향해 총공세를 퍼붓고 있는 게 아닌가. 벌써 다리 눈에 보이는 곳만 세 군데다.

참 너무한다.

버킷리스트 한 줄 지워보겠다고 제주까지 날아왔는데 매정한 모기새끼.


조용히 책을 덮고 상처에 손톱으로 십자를 그린다.

그렇게 짧은 독서가 끝났다.

늘 맘같이 딱 떨어지는 게 없다.


환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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