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써보는 수업, 자아탐색
‘자아탐색’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수업을 은근슬쩍 하고 있다. 이 수업에서 거짓말을 쓰는 용도로 노트를 나눠주고 이름 붙이길 ‘구라노트’라고 했다. 수업준비물 예산으로 질 좋은 노트를 학생 수만큼 준비하고 첫 수업 시간에 나눠 주었다. 우리의 약속은 이것이다.
이 노트 내용은 누구도 보지 못합니다. 보여줄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선생님도 보지 않을게요. 다만 한 문장이도 좋으니 종이 위에 글씨를 끄적여 보고 어느 정도 썼으면 멀리 떨어져서 보기로 합시다.
애들은 선생님이 ‘구라’라는 말을 한 게 웃기는지 수업 시작 전부터 구라노트 얘기가 한창이다. 오늘은 어떤 구라 쳐요? 맨 앞자리 남학생이 해맑게 묻는다. 구라노트에 적힐 첫 글은 선생님이 제시한 첫 문장에서 시작한다.
“2032년 나는 24살이다. 나는 000이다.”
당연히 구라일 수밖에 없다. 미래니까. 그 대신 그럴듯하게 구라를 쳐야한다. 예들 들면 내가 저 빈칸에 연예인, 아빠, 대통령 등 무엇이든 써볼 수 있으나, 하늘을 날거나 초능력을 갖는 등 비현실적인 것은 쓰지 말아야 한다.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이 생기도록 쓰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꽤 열심히 끄적인다. 물론 한 문장도 못쓰는 녀석도 보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선생님이 미리 써둔 내용을 읽어준다.
“2023년 나는 46세다. 나는 오토바이 커스터마이징 전문가다. 나에게 오토바이를 맡기기 위해 해외에서도 오토바이가 배송되어 온다.”
약간의 웃음코드를 넣어서 학생들이 이 구라노트를 편하게 느끼게 하고 어떤 식으로 구라를 치면 되는지 감을 잡도록 도와준다.
두 번째 구라는 2012년으로 지금의 뇌를 갖고 4살짜리 몸에 돌아간 상황.(인생 2회 차 살아보기)
세 번째는 오각형 능력치 만들기, 각 꼭짓점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적기(한 꼭짓점에 외모는 꼭 들어가는데 꽤 많은 아이들이 스스로 외모에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준다.)
네 번째는 오타니 쇼헤이 만다라트 계획표 만들기,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중학생 1/3 정도는 지구 정복을 꿈꾼다.)
수업이 끝날 때 학생들이 노트를 잃어버릴까 봐 교실 캐비닛에 보관해주겠다고 했다. 일부 학생은 혹시 남이 볼지도 모르니 자신이 보관하겠다고 한다. 무슨 비밀스러운 얘기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자기 글을 남들이 읽으면 자신을 허언증 환자로 볼 것 같다고 질색을 한다. 역설적으로 이 학생은 그만큼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썼나 보다. 그런 것이라면 왠지 좋은 글일 것 같다.
중학생의 글은 엉망이지만 재밌는 내용이 많다.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 않고 조사가 어색한 문장이 여기저기에 있다. 그리고 절대 끝나지 않는 한 문장으로 읽다가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제송하다(죄송하다)’, ‘에바다(오버다)’ 따위의 실수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그런 엉망진창의 글씨로 자신의 속에 있던 이야기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거짓말 속에는 감춰진 욕망이나 결핍이 드러나곤 한다. 모든 주제에 진실일 필요가 없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우리 학생들은 시키지 않아도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거짓말에 소질이 없나 보다.
맨 처음 이 수업을 기획한 것은 순전히 내 취향 때문이었다. 노트를 첫 장에서 끝까지 다 쓰고 나서 한 권을 휘리릭 넘겨볼 때의 뿌듯함이 너무 좋다. 그 순간을 위해 지금도 계속 뭔가 쓰고 있다. 공부도 그 노트를 넘기는 감각 때문에 시작했다.
나는 축구화를 신고 등하교를 하던 뒷목까지 까만 초등학교 남자애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학원에 처음 갔다. 공부를 잘하는 친형이 스프링노트 한 권을 주면서 필기하는 법을 알려줬다. 은근히 형 말을 잘 듣는 편이어서 학원 수업 내용을 노트에 열심히 적었다. 대기권에 대한 내용이었고 대류권, 성층권 등 그림도 그려가며 선생님이 수업하는 내용을 빼곡히 적었다. 집에 돌아와서 노트를 보니까 종이 위에 내 손으로 새겨놓은 잉크 자국이 가득했다. 빽빽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 나 공부 잘할지도?”
이후로 필기의 쾌감을 느끼기 위해 필기 재료인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당연히 성적이 잘 나왔다. 다 쓴 노트를 넘기는 쾌감. 볼펜 잉크를 다 써서 아무리 흔들어도 잉크는 나오지 않고 종이만 긁히는 느낌. 이 느낌이 공부를 하게 만드는 중요한 동기가 됐다. 우리 학생들도 이 시기에 그 느낌을 느끼길 바란다. 25명 중 한 두명만이라도.
필기노트가 공부할 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노트 정리를 꾸준히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논리적 이해보다 종이의 감각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