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파씨파, 라씨야
언젠가는 꼭 타고야 말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 점,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핸드폰은 전자시계가 된 지 3일째, 바보가 되어버린 네모난 시계를 뒤로하고 기차역이 표시된 지도를 들고 호텔을 나섰다. 구글맵이 방향과 내 위치를 알려줌에도 나라는 타고난 길치는 어느 여행지에서도 길을 헤매기 마련인데,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역시나 길을 잃었다. ‘아니, 그냥 오른쪽으로 꺾어서 직선으로 쭉 가면 나온다고 했는데….’하고 지도를 다시 보았다. 생각해보니 호텔 마주 보고 오른쪽인지 내 기준으로 오른쪽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디지?
캐나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전공을 선택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4년간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배운 것이라곤, ‘이 전공은 정말 나와 맞지 않는다’라는 사실 뿐이었다. 글쓰기나 <노자 읽기>, <서양철학>, <성경의 이해와 분석>, <포르투갈어 기초> 같은 참 인기 없는 교양 수업에서만 흥미와 두각을 나타냈던 것과 달리 심전도(이건 아직도 모르겠다. 심지어 영어 수업), 운동 처방(뭘 배웠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물리치료(누가 내 기억을 지운 게 분명하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같은 전공 수업에서는 바보가 따로 없었다. 생물과 화학, 체육에 기초지식이 전무한 데다가 애초에 흥미 따위도 없었으니까. 졸업 후에는 당연히 전공과 비슷한 것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했던 나답게 첫 직장은 여행의 상징인 인천공항이 되었다. 그 이후엔 영어 강사, 홍보 같이 주어지는 데로 일을 했다. 강사 일을 할 때는 영어전공이 아니라, 홍보 일을 할 때는 경력이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도 제대로 섞이지도 못한 채, 자주 길을 잃고 그렇게 20대를 고스란히 헤매버렸다. 성공과 안정이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해야 할 텐데, 그래서 나는 지금 어디쯤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조바심이 났다. 기차역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길을 물어볼 사람조차 없어 일단 무조건 큰길로 나갔다. 골목골목에 사람은 물론 개미 한 마리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축제가 있어 사람들의 행군을 위해 작은 골목을 봉쇄했다. 큰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저 멀리서 거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러시아 해군의 행군을 마주했다. 칼처럼 딱딱 떨어지는 움직임은 아니지만, 절도 있고 용맹한 러시아 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잠시나마, 구소련이라는 어느 역사 속의 한 장면에 심취해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큰 동상을 중심으로 러시아 국기 색(빨강, 파랑, 흰색)의 풍선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 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흰색 풍선하나를 건네준다. 누가 봐도 관광객인 나에게 문득 건네준 풍선에서는, 러시아의 한 가정에서 밥 한 끼를 먹은 것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가르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동작을 하신다. 아마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시는 것 같아 냉큼 가장 만만한 동상 옆에 섰다. 풍선을 건네 줄 때도, 사진을 찍어줄 때도 미소 한번 지으시지 않는 아주머니(좀 화나 보이기도?)에게 드디어 한국에서 외워온 러시아어 한마디를 뱉었다.
“Спасибо!”
스파씨파! (감사합니다)
아주머니와 그 손을 꼭 잡고 있던 어린 남자아이가 처음으로 활짝 웃는다. 웃으니, 그렇게 순박해 보일 수가 없다.
흰 풍선을 손에 꼭 쥐고, 더 큰 광장으로 나가 이번에는 민간인들의 행군을 구경했다. 알고 보니 이곳은 5월 1일, 노동절이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푸시킨의 작품같이 감미로운 러시아어를 내뱉다가 이따금 “우라 라시야!”라고 외친다. 사회자의 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회자를 따라 외치는 걸 봐선 당당하고 힘이 넘치는 말임이 분명하다. 풍선도 들고 있겠다. 우산도 없겠다. 외모만 좀 밋밋한 마음만은 현지인인 나도 따라 소리쳐본다.
“우라 라시야!”
위대한 러시아!
결국, 길을 물어물어 기차역에 도착했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멀리서 출발을 기다리는 횡단 열차를 보았다. 길기도 참 길고, 시커먼 연기를 잔뜩 뿜어내는 것이 웅장하다. 당장이라도 올라타고 싶지만, 다음을 기약한다. 다음에 또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니 가방에 스니커즈를 넣어둔 것처럼 든든하다. 하지만 무려 4시간을 넘게 헤매서 도착한 것 치고는 적은 감동의 물결이다. 헤매는 길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가. 목적지에 다 와버렸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돌아보니 막상 기차역보다는 헤매는 길목에서 만났던 온갖 소중한 것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아주머니의 미소, 하얀 풍선, 그리고 ‘우라 라시야’라는 외침.
그러니, 조금은 헤매도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여 본다. 막상 가보면 별것 아닐, 어쨌든 영원하지 않은 것만 보고 가다가 정작 길을 헤매지 못한다면, 그 여행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 러시아를 다녀와서, 한 달 내내 고민하던 전공을 과감히 ‘Marketing’으로 선택했다. 이것이 과거의 내가 했던 선택처럼 돌아가는 길이여도, 어느 길목을 헤매는 중이라도 괜찮다. 나는 지름길로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단 목적지로 가고 있는 매 순간을 사랑하기로 했다. 아주머니의 미소, 하얀 풍선, 그리고 ‘우라 라시야’라는 외침을 만나기를 또 한 번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