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rmycanada Oct 05. 2020

왜 글을 쓰세요?

하하. 실은 내적 관종입니다! 


   몇 달 후면 그동안 '빠른'이라고 우겨왔던 것이 쓸모없어지는, 정말 30이 되는 순간이다.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앞의 '3'이 이렇게 훅 와버렸다. 서른이 코 앞인데 나는 여전히, 집도 없고 번듯한 직장도 없고 심지어는 운전면허증도 없다. 통장잔고는 말할 것도 없다 - <나의 캐나다에게,> 인쇄비와 학비 탓이라고 해두자-. 퍼부은 건 많은데 이렇게 남는 것이 없다니,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불편한 '셀프 팩트 폭격'적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럼에도 나는 돈 한 푼, 스펙 한 줄 채워지지 않는 글을 쓴다.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쓸 예정. 아마 나에게 무수한 사람들이 왜 책을 내고 글을 쓰는지에 대해 묻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특히 <나의 캐나다에게,>를 출간하고 나서는 그런 질문을 더 많이 받게 된다. 


스스로에게 조차 물었던 적 없는 "왜 글을 쓰세요?"라는.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입국하고 나서, 매일 짙은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발 밑을 비추는 라이트 한 점 없는 채로. 어디를,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지도 모르는 그 막막함과 두려움이 나를 더 깊숙한 나락으로 빨려 들게 했다. 그 우울은 마음을 짓눌러 타인과 말하고, 어울리는 것을 꽤나 힘겹게 만들었다. 때 아닌 코로나 '덕분에'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아, 코로나 때문에"는 많은 것에 면죄부를 주는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더 철저히 세상과 분리되고자 어디에도 가지 않고 틀어박혀 글을 썼다.


 나를 '불태운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은 애너지소모가 크다. 잠자던 뇌의 기억회로를 돌려 당시의 감정을 떠올려야 하고, 그럼에도 원하는 만큼 적절히 표현되지 않을 때는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라는 자괴감과 한탄에 타자기 앞에서 그렇게 한 참을 멍하게 있는다. 뜯어고쳐봐도 회생이 되지 않는 문장따위를 보고 있으면 가끔 머리를 쥐어뜯기도한다. 다행이다. 머리 숱이 많아서. 


 글을 하나 둘 완성해가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좋은 신호다. 우리는 살기위해 숨을 쉬지만, 그걸 망각해야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가니까. 방에 틀어박혔던 나는, 서점으로 책방으로 세상을 향해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보았다. 그러다보니, 숨통이 좀 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쓴다. 대단하고 철학적인 어떤 이유로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나를 드러내보자면 이렇다. 글 쓴다는 것은, 나에게 숨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유도 모르겠고, 그냥 그래야 하니까 쓴다. 가장 자연스럽게 살기위해 매일 종이 위에 숨을 내뱉는다. 다만, 흰 종이라는 무(無)에서 까맣고 정돈된 가장 나다운 유(有)를 창조했을 때, 그것이 아름답고 선하기를 바란다. 잘 팔리는 매력적인 글이기 보다는, 투박하고 모자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잔잔하게 쓰다듬어주기를 바란다. 당신의 삶의 한 순간을 가치있게 만들기를 바란다. 나의 숨이, 그렇게 당신에게 닿기를 바란다. 이 정도면 '왜 글을 쓰냐'는 당신의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었기를.

이전 15화 (러시아) 조금은 헤매도 괜찮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