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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mycanada Sep 07. 2020

(러시아)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블라디보스토크, 푸쉬킨 카페 


 

  날씨의 요정이 아닌, 비의 요정답게 러시아에 있는 3일 내내 비가 왔다. 첫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걸 보고는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나갔다. 우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걷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선 우산이 필요했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Umbrella, Please.”


편의점에서, 길거리 좌판에서, 문구점에서 엄브렐라 플리즈를 몇 번이고 외쳤지만,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나중에 그냥 다짜고짜 우산을 펴는 시늉을 했다. 다들 손을 휘휘 젓는 걸로 보아, 대충 없다는 말 같았다. 아니, 우산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다. 우산을 찾아 거의 2킬로는 넘게 걸어 이미 아침에 고데기로 곱게 손질한 앞머리는 다 젖어있다. 지나가는 유리창에 비추는 나를 보니 젖은 앞머리가 5:5로 갈라져 청학동에서나 나올 법한 도령 같다. 어이가 없는 건지 그런 몰골이 웃긴 건지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결국, 나는 우산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그래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다. 길거리를 다니는 현지인 10명 중 두 어명은 우산을 쓰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푹 넣은 채로 그냥 걷는다. 나도 머플러를 더 동여매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그래, 비 좀 맞는다고 큰일 안 난다. 왠지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허세 넘치게 길을 걸었다. 아름다운 도시를 향해. 





Кафе Пушкинъ

   

   험상궂은 날씨 탓에 야외 위주였던 계획을 전면 변경했다.  카페 투어를 할 심산으로 호텔 침대에 누워 '블라디보스토크의 예쁜 카페'를 검색했다. 유럽의 향이 나는 꽤 분위기가 좋은 카페들이 많아 보인다. 처음으로 가보기로 마음먹은 카페는 ‘푸쉬킨 카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유명한 푸쉬킨의 작품을 많이 진열해 놓았다고 해서 푸쉬킨 카페라고 이름 지었다고. 대로변에 큰 간판으로 쓰여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간 카페는 그야말로 ‘취향 저격’이다.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바닥, 붉은 벽돌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벽, 그 사이에 틈틈이 박힌 <리사 아가씨>나 <역참지기> 같이 감미로운 푸쉬킨의 작품들, 정갈하게 놓인 소박한 테이블과 투박한 찻잔들. 이 도시가 주는 향과 공기와 분위기라는 소품을 한 공간에 갖다 놓는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다. 




   허리 높이까지 하늘을 보여주는 넓은 창가에 방석 몇 개와 쿠션을 얹어 아늑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창가라 한기가 전해지지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러시아의 풍경을 가슴으로 담기에는 제격이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고 따뜻한 카모마일을 한잔 시켰다. 깊이 있는 고동색 테이블 위에 멋스러운 찻잔이 예뻐 보여서 카메라에 담아본다. 여행기간 내내 비가 오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비가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운치있는 빗소리와 적당한 음산함이 없었다면 창을 통해 보는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명화를, 보지 못할 뻔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쉬킨 


푸쉬킨의 시처럼, 

이번 러시아 여행엔 비가 늘 함께일지라도 이 모든 것은 반드시 하염없는 그리움으로 남을 것 같다.  

캠핑에서는 불멍을, 푸쉬킨 카페에서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가만히 보면서 비멍을 때린다. 읽으려고 가져온 책은 어느새 소품이 되어 무릎에 포개져있다. 텅 비어버린 공간과 시간만큼, 블라디보스톡이라는 이 도시가 내 안에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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