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쯔비니체, 이쯔비니체, 이쯔비니체, 이쯔비니체, 이쯔비니체, 이쯔비니체
1년 반을 조금 넘게 몸담았던 회사에 시원하게 사직의사를 밝혔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을 정해 놓고 나니 그늘졌던 마음에 햇빛이라도 드리워진 듯이 삶이 푸르러지기 시작했다. 물론 사직의 마음을 먹었을 때도 후련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후련함을 넘어선 설렘과 기대가 공존했다.
그간 통장에 알뜰살뜰 모은 돈을 뿌듯하게 세어 보았다. 별다방 커피 대신 맥도널드의 천 원짜리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커피는 절대 포기 못한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흔히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을 딱 절반으로 줄여 모은 돈이었다. 덕분에 유학을 목표로 했던 금액의 돈을 다 모으고도 ‘퇴직금’이라는 여윳돈이 생겼다. 퇴직금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나는 금액조차 짐작하지 못했고, 회사에서 퇴사하는 사람들에게 밥이나 한 끼 사 먹으라고 주는 일종의 ‘용돈’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통장에 찍혀있는 금액을 확인했을 때, 사직서를 던진 그 순간 느꼈던 설렘과 기대를 넘어선 짜릿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신난다. 히죽거리며 그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저금할 생각은 곧 죽어도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을 가자
여행지를 고르기 위해 검색을 하던 중, 유난히 한 편의 시 같은 문장이 들어왔다. ‘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블라디보스토크’. 단 한 시간의 비행으로 볼 수 있는 유럽이라니. 게다가 이 도시는 항상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종착지이자 시작점이었다. 더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러시아에 가기로 결심하고 비행기 티켓을 바로 예매했는데, 어쩐지 이메일로 결제했다는 내역만 뜰뿐 E-ticket이 날아오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외국 항공사이지만 당연히 한국인 상담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영어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녀는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안 악센트와 코리안 악센트로 인한 의사소통의 부재로 우리는 그렇게 30분간 전화기와 씨름을 했고, 결국 “시스템의 일시적인 오류”라는 아주 심플한 답변을 받아냈다. 이렇게 비행기 티켓은 다행히 일단락되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고민에 맞닥뜨렸다. 바로 “의사소통”.
영어를 쓰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나라에서 어떻게 길을 찾고, 주문을 하고 택시를 타지? 구글맵을 보니 심지어는 간판도 러시아어다. 맛집 찾아가긴 글렀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유튜브에 ‘간단한 러시아어’를 검색했다.
러시아에 가기 전, 유튜브에서 알려주는 간단한 문장 10개 정도를 외웠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영수증 주세요, 이거 한 개 주세요(다행히 숫자는 1까지만 알면 된다), 제 이름은 안드레아입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길 잃었을 때 한국영사관에 데려다 달라고 최대한 짧게 말하는 법), 네, 아니오, 카페가 어디입니까? 등등.
특히 나는 ‘이즈비니쩨’(죄송합니다)를 필사적으로 외웠는데 그건 유튜브에서 추천 영상으로 띄워주는 ‘불곰국 형님들 클래스’라는 동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불곰이 상징인 나라답게 터프한 러시아인들에게 자비란 없어 보였다. 재미를 위해 편집되어 만들어진 영상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싸움이 날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주문처럼 이쯔비니체를 뱉어낼 심산으로 죽어라 외웠던 것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예의 바른 한국인이니까!
몇 개 안 되는 러시아어를 샤워할 때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산책을 하다가도 속삭였다. 왠지 그 문장들을 내뱉을 때마다 러시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혼자 공상에 빠져, 파란 눈과 험한 인상을 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즈뜨라이스 부이체!(안녕하세요)라며 인사하는 나를 그렸다. (실제론 비행기 탈 때 딱 한번 해봤다) 러시아어를 속삭이는 모든 곳이 설렜고 그곳이 어디든 가본 적도 없는 러시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가 알았으랴, 전화 한 통에서 이렇게 여행이 시작되었을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