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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mycanada Sep 27. 2020

(미국) 명상

눈을 감아보아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니 컵 표면에 안개가 맺힐 만큼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이 소원이다. 이 곳, Will Steger Center 마을에는 냉장고가 없어, 늘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 한다. 냉장고의 역할을 하는 창고가 있긴 하다. 메인 오두막 맞은편에 깊은 굴을 파 놓았는데, 얼음이 서릴 정도로 한기가 느껴지는 공기가 음식물을 부패로부터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고 한다. 잠깐 제나를 따라 들어가 본 그곳에는 작년에 수확한 라즈베리가 꽝꽝 얼어있고, 중간중간 스튜용 고기도 보인다. 냉동 라즈베리는 요구르트에 넣어먹기도 하고, 잼을 만들기도 한단다. 과일을 쉽게 볼 수 없는 겨울이 오면 꽤 요긴할 것 같다. 이 자연 냉동고는 크지 않아 정말 냉동보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넣지 않는다고. 이곳에서는 전기도 물도 쓸 수 없어 불가능한 것이 많아 보이지만, 자연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은 주는 모양이다. 침대가 없어도 땅이 있고, 마트가 없어도 풀 숲에 널리고 널린 것이 블루베리와 라즈베리다. 샤워실이 없어도 호수가 있고, 인터넷이 없어 노래를 틀 수 없어도 저녁시간에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는 모건과 로라의 노래가 귀를 황홀하게 한다. 게임이나 오락거리가 없어도 밤에 모닥불에 모여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없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것들도 막상 없어 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 편리가 필수가 아니라는 것은 덕분에 이 곳에 와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저녁을 먹고, 로라가 알려준 동산에 올라가 보았다. 아직 인류의 손길이라고는 한 번도 닿은 것 같지 않은 수풀을 헤쳐야 한다는 수고스러움이 있지만, 그만한 가치를 하는 곳이다. 큰 바위에 숲을 등지고 앉으면 대각선 맞은편으로는 넓은 광야가 반, 깊은 호수가 반 섞여있다. 뒤로는 통통한 야생 블루베리가 잔뜩 있다. 목이 마르면 가끔은 블루베리를 따먹기도 한다. 그냥 소매에 슥슥 닦아서.


 바위 가장 끄트머리에 올라 명상을 시작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니, 바람이니 햇살이니 하는 것들이 살결에 닿는 느낌이 매우 좋다. 왠지 반쪽이 없는 눈썹과 울긋불긋한 맨 얼굴의 내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아 홀가분하다. 머리카락엔 호수 냄새가 가득하고, 옷깃에는 어제 태운 장작의 연기가, 방금 본 하늘을 머금은 눈은 그것을 그대로 담아 노을이 박혀있겠지. 그리고 살결엔 햇빛이 스며들어 솜털이 바스락거릴 것만 같다. 이렇게 예쁜 구석이 하나 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들을 눈을 감고 찬찬히 감상한다. 나를 포함하여. 


  화장을 하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잠에 들면서도 늘 무언가로 채웠던, 비움을 두려워하던 시기가 있었다. 오죽하면 밥을 먹는 시간에도 남이 먹는 모습을 틀어 놓고 먹을 정도였으니. 그만하면 거의 병적으로 귀를, 뇌를, 눈을 채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내게 Will Steger Wildness Center라는 날 것의 시간이 그대로 주어진다는 것은 거의 고통에나 가까웠다. 인터넷이 없어 핸드폰은 더 이상 울리지 않고, 모르는 것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검색하던 바쁜 손눌림 마저 멈춰야 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왜,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런 편리가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을까. 


 현재를 살면서 지나가버린 과거를 돌아보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던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명상을 통해 '지금'를 그대로 맞닥뜨렸다. 마치 짝사랑하던 사람의 곁에서만 맴돌다가 눈을 마주쳤을 때의 순간처럼 고통과 두려움은 평화와 환희로 바뀌었다. 그렇게 온전히 비워진 귀와 뇌와 눈에 지금을 맘껏 담았다. 


그렇게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지금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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