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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n 10. 2020

내 마음 나도 모른다

걷는,사람-제주 올레8코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구름은 끼었지만 오후 6시쯤에나 비소식. 


숙소에서 잠을 설쳤지만 덕분에 일찍 일어나 여유롭게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호사를 누려본다. 시가 새겨진 비석을 훑는 동안 어디선가 폭포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천지연일 게다.



출발해 보자고. 오늘은 8코스다. 4번째 걸음이다. 처음 한여름 홀로 걷기, 두번째는 한여름 게릴라모임으로, 가장 최근에는 한겨울 홀로 걸었다. 중문관광단지와 해안길을 주로 지나는 8코스는 약 20km 정도 되지만 잘 정돈된 자연 배경으로 생각에 잠겨 걷기에 아주 적절한 코스다.


이전 기억을 떠올려 이번에도 혼자 걸어볼 작정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동행자가 늘어났다. 숙소에서 만난 사람, 수개월 전 스쳐간 사람, 그 사람과 동행한 사람, 얼마 전 함께 걸은 사람...  


뭐, 날도 궂은데 혼자보단 여럿이 안전하겠지.


거대한 약천사


대포포구, 주상절리를 지난다.


발렌시아 거리에 오렌지가 있다면, 제주에는 귤(하귤)이 주렁주렁.


아직 오전인데도 잔뜩 찌푸린 날씨, 조짐이 좋지 않다.


기어코 비가 쏟아진다. 아직 오전인데... 제주의 장마는 너무 이르다. ICC(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우비를 단단히 동여맨 후 다시 길을 나선다.


베릿내오름. 름을 올라갔다가 다시 같은 자리에 내려오는 드문 코스다. 오르막 경멸자인 나로서는 스킵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이전까지는 당연스레 스킵하였으나, 이번엔 제대로 올라 보리라... 다짐하였건만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대세는 오름을 스킵하는 것으로 기울었다. 뭐, 다음을 기약할 밖에.


헌데, 최근 다리(천제2교) 공사로 코스가 좀 바뀌었다. 본래는 오름을 올랐다가 나무 데크를 타고 시냇물을 건너는 코스인데, 진입이 당분간 불가능해졌다. 이런 젠장. 8코스의 백미 중 하나인데. 도대체 왜 지금!! 덕분에 코스가 너무 밋밋해져 버렸다.


설상가상. 식사 장소는 코스를 한참 벗어난 곳의 식당. 비도 오고 하니 식사를 마치고 원래 코스로 다시 진입하기보다 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으로... 중지가 모아졌다. 아니, 중지는 아닌데 어찌어찌 그리 되어 버렸다.


덕분에 중문은 휙 건너뛰고 예래생태공원으로 바로 진입한다.


비가 와도 예래는 고즈넉하고 운치가 있다.


여전히 무서워 파랗게 질린 녀석.


거친 파도와 괭생이모자반의 앙상블을 지나는 동안, 나는 8코스의 두번째 백미인 논짓물을 놓쳐 버렸다. 민물과 바다의 접점, 물놀이 최적의 장소인데, 푯말을 보고도 누군가와 말을 나누느라 깜빡 놓쳐 버린 것이다. 이런 불상사가...


잠깐 멈추어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도 위안이 되는 곳인데.. 하긴 내게 보물이라고 남에게도 보물이란 법은 없지.


오늘따라 하예포구마저 각이 안 나온다.


그럭저럭 도착한 종착지. 아! 8코스의 세번째 백미이자 하일라이트, 힘든 여정에 선물같이 다가오던 박수기정이 온통 비안개에 묻혀 버렸다.


비는 잠시 소강 상태가 되어


오늘의 하일라이트는 그 체면을 되찾았을까.


코스가 변경되고 여러 구간을 스킵하는 동안 오늘의 여정은 퍽이나 줄어들었건만 피로도가 평소의 3배로 느껴졌던 것은 날씨 탓이었을까. 뚝뚝 끊겨버린 여정 탓이었을까. 호젓한 행로의 증발 때문이었을까.


김승옥의 <역사(力士)> 속 서술자 '나'는 자신이 지냈던 하숙집 두 곳을 비교한다. 동대문구 창신동의 빈민가에 있던 하숙집과 깨끗한 양옥집. 전자는 지저분하고 무질서하며 가난한 생활의 표본이었다면, 후자는 안정적이고 규칙적이며 깔끔한 중산층의 분위기를 풍긴다. 전자에서의 생활에 질려 버린 화자는 하숙집을 옮기지만 차츰 이전 하숙집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게 된다. 전자에서의 삶이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쳤다면 후자에서의 삶은 지루하고 기계적이며 삭막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 생활로 다시 돌아갈 것이냐 하면, 그건 또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결국 화자는 '나란 놈은 알 수가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를 일갈한다.


홀로 올레길을 걷다 보면 오롯이 자연과 나만의 교감이 이루어낸 적적함에 흡족함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연속되다 보면 호젓함과 고요함이 어느덧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바뀌어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길을 사랑하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과 북적북적 길을 나설 때면 흥겹고 진진하기도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불쑥 밀고 들어오는 낯선 이들의 도를 넘은 관심에 진저리를 치며 나만의 알 속으로 다시 숨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잘 짜여진 계획에 맞춰 도장깨기하듯 하는 여행의 재미도 좋지만 때로는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여정에서 비롯되는 재미가 쏠쏠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대하고 예상하던 일들이 의외의 계기로 뒤틀리고 증발되는 순간 허탈함과 더불어 울분이 치미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우니, 나란 놈도 참 알 수 없는 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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