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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n 14. 2020

선연과 악연 사이

걷는,사람-제주 올레12코스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의외의 맑은 하늘, 그리고 한라산이 반만 고개를 내민다. 그러니 가볍게 출발.


12코스. 출발점은 무릉외갓집. 버스편이 적어서 교통이 꽤 불편했던 곳. 오늘은 숙소 샌딩 서비스로 편히 간다.


제주 곳곳은 4.3의 흔적이 많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스러져갔고, 희생자들의 가족과 후손, 그리고 제주 땅에 상처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질까. 희생자들은 분명한데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아무리 격동의 시대였다 해도 생명을 함부로 다룬 자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12코스는 대정의 내륙에서 시작해 바닷길을 따라 용수포구까지 이어진다.


아침엔 제법 맑을 듯하더니 점점 더 안개가 밀려온다.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는 입깁'처럼 해무가 밀려들어온다.


밭을 지날 때는 조냐, 기장이냐...쏭달쏭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밭벼'라고 다. 밭에서 나는 벼는 맛이 없다지만 농지로 개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연못이라는데, 물은 어디로?


산딸기가 유독 빨갛게 잘 익었다.


안개싸인 녹남봉... 혼자 왔다면 으스스할 만한 숲이다. 날이 좋았을 땐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들도 신경이 쓰인다. 상황은 사람의 시각과 생각을 만든다.


춥춥한 숲길을 지다 만난 선물.


흑백영화의 유일한 붉은 점과 같은 풍경이다. 어렸을 적 식물도감에서나 봤을 법한 꽃의 자태... 무심코 '백일홍'이라 불렀는데, 정말 백일홍이었다. 저렇게 촌스러운 분홍이 이렇게 흡족하게 다가온다. 자연이 내는 신비로운 염색 탓이다.


오래 묵은 담벽을 지나면


오래 묵은 교정이 나타난다. 오래 전에 학교였을 이곳은 이제 도자기를 굽는 '산경도예'가 되었다. 잠시 쉬는 쉼터이자 중간 스탬프가 있는 곳.


여귀의 입김 속으로 들어다.


신도바당올레.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바다인 줄도 모르고 지났을 안개 속에서 그래도 간간이 포말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도구리. 신도리에는 4개의 도구리가 있다고 한다. 물고기나 문어 등이 파도에 쓸려 이곳 도구리에 산다는데. 여름철 물놀이 좋을 듯하다.


돌고래 '제돌이'가 사는 지역이라는데... 1월에 왔을 땐 돌고래 떼를 보았지만 오늘은 언감생심이다.


마늘은 흐린 날에도 한창 태닝 중. 갑자기 비가 들이치면 저 많은 것들을 어찌 처리하나.. 하는 기우.


맞다. 제주는 화산지대. 용머리해안에서나 봤을 법한 지층이 세월의 누적을 증명한다.


시작에서 끝까지 의뭉스럽다. 절경으로 유명한 이곳인데... 맑은 날 안와봤다면 거짓부렁이라 욕했을 테지만 나는 12코스의 절경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본 두 번의 기억만으로 이곳의 본질을 논할 수는 없다. 열 번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는 것은 물 속에 잠겼다 보였다 하는 '여'의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사람... 말할 것도 없다.


올레를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사람들일 거라는 순진한 착각을 했다. 세상 부귀를 벗어나 자연을 벗삼는, 그저 혈혈단신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 나와 비슷한 인생 고민을 하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흔쾌히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들... 일 거라는 밑도끝도 없는 착각을 하였더랬다.


세상 어디서나 다양한 인간군상이 존재하듯, 이곳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물론 낯선 이들과 5-7시간을 함께 걷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밀감과 동질감을  경험하게 되지만 환상과도 같은 걷기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이들의 민낯이 불쑥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내가 느꼈던 마음이란 것도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최악은 우연히 길동무가 되어 걷는 동안에조차 공감하기 어려운 이와 동행했을 때이다.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아도 단 몇 마디만으로도 대화가 어긋나는 사람, 하지만 아직 남은 여정의 유일한 동반자. 아무리 가식적인 예의를 갖추어도 통할 수 없는 이들은 존재한다. 사실 우연히 동반하게 되는 이들의 8할 이상은 대화가 수월한 편이지만 가끔은 20km의 힘든 도정보다도 더 무겁게 다가오는 동행들이 있다. 아무리 부드럽게 공을 던져도 절대 받아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 한동안의 동반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게 뒤돌아가버리는 사람. 반면, 쿨하게 돌아서야 하는 때에도 끊임없이 질척대는 사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가진 사람. 인간관계 어디서나 지켜져야 할 거리. 가깝고 멀기는 너무나 다변적이고 상대적이라 터득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불행히도 하필이면 이날따라 그 둘과 동행을 하였다. 그리고 이날 한을 품은 여귀의 입김만큼이나 아득하고 갑갑한 마음으로 여정을 마쳤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것은 아니다. 내가 그들의 전부를 본것도 아니고, 나 역시 그들에게 통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드문 일이긴 했지만 나는 이날 (엔간하면 입지않는) 마상(마음의 상처)을 입은 채로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고, 또다른 이들과의 선연으로 그 상처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위안을 받는 법인가 보다.


오늘 차귀도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이전의 기억으로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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