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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n 15. 2020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게

걷는,사람-제주 올레11코스

악명높은 11코스.

모슬포 하모체육공원에서 출발, 모슬봉을 지나 무릉외갓집에 이르는 사이 수많은 무덤과 2개의 곶자왈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남녀무론하고 슬쩍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지난 겨울 두어 명의 동행과 함께 다녀온 나로서는 무덤이나 곶자왈이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계절 탓이었는지 그저 회색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오늘은 숙소에서 만난 (나보다 훨씬) 젊은 피 셋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젯밤 이들과 함께 펍에서 즐거운 맥주 타임을 가졌다. 젊음은 너무나 밝고 경쾌하다. 퇴사 혹은 휴지기라는 이들은 사회 생짜의 시기를 넘어선 이유인지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거리를 둘 줄 안다. 낯선 이들과 쉽게 동행하지만 쓸데없는 오지랖을 시도하지 않는 세대답다. 이들에게 퇴사나 휴직은 실패나 낙오의 이름이 아닌 해방과 자유, 또다른 비상을 위한 다지기다.  아직 장거리 걷기가 익숙지 않고 다리가 튼튼하게 여물지 않았어도 제주의 풍경과 올레 걷기를 사랑한다는 이들이 너무나 기특하여 나의 여정에 끌어들였다. 나 역시 이들이 없었다면 이번 에 11코스는 생략할 예정이었기에 서로에게 타이밍이 좋았다.


숙소 바로 앞에 돋아난 초피(제피)나무. 자리물회와 함께 먹으면 비린내를 잡아준다는 잎인 만큼 향이 강했다.  


초입의 모슬포 항을 지나


산이물 앞바다에선 해녀 교육이 한창인 듯. 희한하게도 파도가 해안까지 들이치지 않고 해녀들 바로 앞에서 주춤한다. 지대가 높아지는 건지..


고흐의 '노란집'이 연상되어 한컷.


금계국의 열렬한 환영 꽃길


외곬이란 이런 것임을


제주에서 군생활을 한 이들에겐 매일 오르내리는 훈련 탓에 일명 '몹쓸봉'이라 불렸다는 모슬봉은 생각보다 수월하다.


날이 흐려 전망이 좋지 않아도 뷰파인더 안에선 그럴싸한 풍경이 된다.


모슬봉 묘지들, 망자들의 시야에 들어왔을 전망.


다육이마저 꽃을 피우는


6월의 제주.


생과 사는 공존하기 마련. 천주교인들의 묘지 지나


정난주 마리아의 묘지. 남편 황사영과 함께 신유박해의 희생자이자 절한 모성의 표상.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고발하고 도움을 청하려던 황사영의 백서가 발각되면서 남편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정난주 자신과 아들 황경한은 노비로 전락하여 제주로 유배된다. 유배길에서 사공과 관원들을 매수, 아들을 추자도에 내리게 하여 화를 면하게 한다. (추자도에 황경한의 묘가 있다)


역사의 단 몇줄로 요약되는 수많은 삶과 죽음은 무상함을 실감하게 한다.


식당 앞 댕댕이는 삶이 무료한지.


곶자왈의 포문이 열린다.


돌무더기와


정돈되지 않은 야생 나무, 덩굴 아무리 인간의 접근을 거부해도


집요한 인간은 기어코 비밀의 문을 어제껴


삶도 죽음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철모르는 어린 것들은 무작정 꼬리를 흔들면서도 선뜻 가까이는 오지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귀엽다.

아직은 경계보다는 유연함이, 용의주도보다는 무모함이, 노련하지는 못해도 풋풋함이 주를 이루는 시기는 너무나 찰나적이어서 어느 순간 자신의 뒤켠으로 저만큼 물러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기성'이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어 자신만의 경직된 칼날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젊음과 나이듦의  때문은 아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일방적인 배타는 나이를 불문한다. 자신의 잣대로 꼬장꼬장 잔소리를 해대는 나이든 꼰대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양 장막을 치고 보는 젊은 꼰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오늘, 같은 숙소를 쓰는 한 친구가 올레 첫완주를 했다. 그를 축하하는 맥주 파티가 열렸다. 얼마 전까지 같은 숙소에 있던 70대 여사님도 올레 첫완주를 하고 돌아갔다.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잠깐잠깐 스쳐가는 공간이지만 아직까지 치기어린 무모함을 가진 이들을 발견할 때면 묘한 동질감으로 여행의 보람을 느낀다.    


무릉마켓. 내일이면 누군가에게 출발점이 될 종점에 닿는다. 지난 번 11코스와 이번의 11코스는 또 달라졌다. 다음의 11코스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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