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 Jun 16. 2020

왜 사냐건,

걷는,사람-제주 올레13코스

오늘은 빼박 우중올레... 용케 장대비를 피하려나 했더니 기어코 아침부터 의심할 수 없게 비가 내린다. 겨울철 비바람 부는 우중올레도, 한여름 태풍 속 우중올레도 이미 겪어본 바, 우중올레 나름의 재미와 운치가 있다. 우비를 입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릴 적 텐트에서 듣던 빗소리가 생각나 운치가 있고, 오는 비를 5-6시간 맞다 보면 제아무리 깔끔을 떨려 해도 망가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어른이 된 이래 더이상 겪어볼 수 없는 이색 체험이기에 흥미롭다.


허나 비바람 부는 날 홀로 우중올레를 감행하려면 코스의 선택이 중요하다. 비교적 안전한 지대를 골라야 할진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중올레를 흔쾌히 떠날 이들을 동행으로 만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행 중 둘은 이미 산티아고를 여러번 다녀온 고수들이었다.


13코스의 시작은 12코스의 끄트머리 용수포구다. 근방에는 김대건신부 기념성당이 있다.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용수포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세운 성당이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황사영의 백서가 전시되어 있다. 지난 겨울 이곳에 들어섰을 때, 는 또다시 울컥했다. 고단해서일까. 왜 여행중 성당에만 들어서면 눈물이 나는 걸까. 

지은죄가 많아서...? (딩동댕)


용수포구 이래 13코스는 내륙으로만 이어진다. 이는 흙탕물을 만날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  나도 물에 잠긴 비트나 양파 꼴이 될 것이다.


아예 드러누운 밭벼... 밭벼가 눕는다. 비바람에 나부껴 울다가 아예 드러누웠다. 비바람이 그치면 과연 전처럼 일어서긴 할까.


흙물이 고인다. 이 정도쯤이야. 가뿐하게 피해지만.


올것이 왔다. 돌아서지 않는 이상 불가피해져 버린 흙탕지대. 우중올레를 감수한 이상 언제고 닥칠 일이다. 아무리 방수용 등산화를 신어도 발목에 잠기면 발가락의 침수를 피할 수 없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 시점을 최대한 늦춰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재미있는 건 그 시점을 선택하는 데에도 개인의 특징이 드러난다는 것.


누군가는 아예 흙탕물 초기부터 과감하게 입수한 후 내내 속 편하게 첨벙첨벙 건너가고, 누군가는 피하는 데까지 최대한 피하다가 어쩔 수 없을 때 비장하게 침수를 맞이한다.


크게 한번 젖고 나면 오히려 행동거지는 편해지기 마련이다. 더이상 길 귀퉁이를 까치발을 들지 않고 웅덩이 한가운데를 그리스도마냥 성큼성큼 들어선다. 이왕 망가진 몸... 거침없는 경험론자들의 삶이 그럴까. 체득한 만큼 얻는 법이다.


헌데, 크게 한번 젖고 난 후에도 물이 조금 덜 고인 길을 만나면 기어코 깨금발을 들어 피가려는 속성의 소유자도 있다. 이미 신발 안까지 다 젖어버렸는데도 말이다. 쫄보인 나는 물론 후자다. 무엇이 두려워 늘 주춤주춤, 어정어정, 머뭇머뭇 하는 걸까. 단 한 번도, 무엇에도, 모든 것을 던져버릴 용기도, 배짱도 없는 겁쟁이...

하지만 더는 피할 수 없는 큰 웅덩이를 만났을 때 적어도 돌아서지는 않는 게 진전이라면 진전일까. 인생에도 적당한 위기는 사람을 성장시킨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웅덩이들의 고비를 넘고 나면


풍요로운 용수 저수지를 지난다. 이 동네는 물이 많은 동네다.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도 보인다.


지나는 이들을 경계하는 누렁이까지는 좋았다.


헌데, 공중화장실에 불현듯 나타난 들개 녀석. 밖에서 하도 짖어대길래 뉘집 개가 이리 짖나 했더니, 주인 없이 떠도는 녀석이었다. 버려진 걸까. 한참을 짖어대는 통에 일행 모두 한동안 정지. 녀석은 이곳이 자신의 구역이라 여긴 모양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텃세는 본능일까. (혼자 지났다면 혼쭐이 났을 생각에 등에는 식은땀이...)


한때 유실됐던 길을 특전사들이 재건했다는 특전사길을 지나고


웅덩이를 피하는 것은 물론 림보 신공까지 발휘하는 경지에 이른다.


아홉개의 '굿'이 있다는 마을. '굿'은 샘의 제주말이다. 곧 아홉개의 샘이 솟았다는 마을인 셈이다.

 

8개까지는 찾았는데.... 중간 정자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젖은 옷을 말린다.


낙천리의 또다른 명물. 바로 천 개의 의자. 마을사람들이 직접 만들었다는데... 과연 천 개가 될지는 모르겠다.



옥수수가 익어가는 마을.


오늘도 연무로 풍경은 글렀다.


그러니 (오르막 경멸자로서는) 저지오름을 굳이 올라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나는 패스... 넷 중 셋은 패스. 그래도 오를 사람은 오른다.


사실 내게 있어 우중올레의 목적은 경치 감상도, 두런두런 대화도, 튼튼한 다리 운동을 위한 것도 아니다. 중간에 멈추거나 돌아서지 않고 그저 묵묵히 끝까지 간다는 것.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뭐하느냐고, 쇠털같이 창창한 날 놔두고 왜 하필 날 궂은 때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딱히 없다. 그냥 가는거다.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같다.

이전 10화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