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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n 09. 2020

장소-되기

걷는,사람-올레10-1코스

고근산의 여파는 컸다. 1주일 강행에도 멀쩡하던 다리가 고장이 났다. 무릎 관절은 물론 고관절, 종아리, 발목, 발바닥, 발가락까지 쑤신다.  올레길 중 가장 짧은 10-1코스, 가파도로 행선지 급변경.


여행 중의 부정확한 정보는 잠시간 시간 지연으로 남기도 하지만 때때로 지연의 연쇄 작용을 일으켜 예상치 못한 개고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3년 전쯤 여름, 는 가파도행 선착장이 모슬포가 아닌 운진항으로 바뀐 사실을 몰라 그야말로 개고생을 한 바 있다. 오전 배를 놓치고 2시간 넘게 기다려 오후 배를 탔지만 태풍 경보로 섬을 제대로 돌아보기도 전에 돌아오는 배를 타야 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현명해졌을까. 나는 분명 3년 전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 운진항으로 고고. 지난 번의 한을 만회하기 위해 나는 9시 출항, 3시 귀항을 기약했다. 매표 직원은 한심하다는 듯,

"2시간이면 충분해요."

"네, 알아요."

"배 시간 예약하면 못 바꾸니까 잘 생각하세요."

"괜찮아요. 그냥 주세요."

나는 최대한 늑장을 부리며 슬렁슬렁 섬을 돌고, 짜장면을 먹고, 써야할 글나부랭이도 끄적거리고, 시심을 불태울 거라고.

표를 받고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녀는

"도대체 섬에서 6시간이나 뭐 할게 있다고?"

나의 사연과 포부를 네가 어찌 알겠냐. 이 조그만 섬에서 내가 얼마나 재미나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지 두고보렴.

20분. 섬 속의 섬에 도착하다.



가파도의 큰 바위에는 올라가는 순간 큰 태풍이나 강풍이 불어 재난이 닥친다는 전설이 있다. (내 보기엔 아이들이 다칠까봐 못 올라가게 하는 강력한 전술로 보인다는)


예류 지질공원에 가져다 놓을 만한 바위도 있다.


갯까치수염


한반도 어느 땅에나 있는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마라도일 것이다. 마라도라는 걸  어떻게 내가 알지? 한 번 가본 적도 없는데. 생김새를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것은 다만 한반도 최남단의 섬이라는 것, 가파도보다 남쪽에 있다는 것. 이런 지리적 정보뿐이다. 이런 정보들을 종합해 나는 저쯤에 있는 것을 마라도로 추정한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안다. 헌데 제주도 인근에는 문섬, 범섬, 섶섬, 새섬....등 자잘한 섬이 많지만 나는 아직도 이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지도상의 위치를 정보로 그때그때 추측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는다. 매일 보고 자랐어도 그럴까. 매일 이들에 대한 사연을 듣고 생김새를 논하고, 주변머리를 맴돈다면.  


무표정한 '공간'이 다감한 '장소'가 되려면  시간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한 사람들과 추억들이 곁들여질 필요가 있다.


가파도는 풍력과 태양열로 무공해 전기를 생산한다고 한다.



이집 주인장을 꼭 만나보고 싶다.


청보리는커녕 황금보리마저 베어지고 그루터기만 남았다.



가우라꽃(바늘꽃)이라고 한다. 철쭉인줄.



 



기어코 짜장면을 먹는다. 맞바닷바람을 쐬며.



송악산, 산방산, 형제섬, 그리고 송악산 뒤켠으로 숨었을 단산, 금산... 나는 산방산 주변머리를 3시간 이상 걸었고, 형제섬을 주구장창 바라보며 송악산을 올랐었다. 멀찍이 선 저 윤곽선들은 마라도의 그것과, 섶섬 문섬 새섬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내게 전자들은 이미 마음의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바람도 장난이 아니다. 파도가 심상치 않다. 초반의 여유와 배짱은 어디로 가고 돌아가는 배편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사실 무엇보다 휴대폰 배터리가 위험하다. 창작열은 어디로 간 걸까.


결국 6시간의 섬나라 기행은 5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절대로 표를 안 바꿔 줄거라고 거듭 강조하던 매표 직원의 엄포와 달리 너무도 쉽게 1시간 이른 귀항이 가능했다. 그녀 덕분에도 가파도는 내게 '장소'로 확실히 자리매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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