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벅이다가

최정례, <레바논 감정> - '껌벅이다가'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너 마주친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을 고르고

지갑 열고 계산을 치르고

잊은 게 없나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곳을 떠나듯


가끔

손댈 수 없이

욱신거리면 진통제를 먹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잠들려고

잠들려고 그러다가


젖은 천장의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와

무릎 삐걱거리고 기침 쿨럭이다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

헛손질만 하다가 말듯이


대접만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

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

떨어져 누운 날

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

한다 해도

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


길모퉁이 무너지며 너

맞닥뜨린다 해도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

껌벅거리다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냥 자리를 떠났듯이


- 최정례, <레바논 감정>, '껌벅이다가', 문지, 2006




이렇듯 유사한 결이라니, 싶어 깜짝 놀라는 시를 만날 때가 있다.

마주침은 우연이겠지만 같은 결로 읽어내는 마음은 필연일 것이다.

어딘지 낯익지만 다른 유비의 세계로 초대하는 시인의 언어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것처럼, 내 것으로 다가온다.


아, 이건 언젠가 껌벅거리던 나의 감정과 같은 것인데,

아, 시인이 수렴해낸 일상의 단어들은 내 것과는 다른 조합이구나,

아,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그 감정을 레바논 감정이라 부르는 시인의 마음은 설명 없이도 내 것으로 스며들어 껌벅거리고.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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