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 '어두워진다는 것'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 2001
어떤 시집이 내 손에 들어온 경위를 생각해보면 대부분 제목 때문이다. 제목은 대부분 시집에 담긴 시들 중 하나로부터 온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펴들 때 가장 먼저 표제작부터 들추어 보는 습성이 있다. 시상(詩想)이 그러하듯, 스치듯 나를 건드리고 가는 시집의 제목은 분명 내 마음 어느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엷은 그림자들 중 하나와 눈이 맞았을 공산이 크다. 눈이 맞으면 말을 나눈다. 말을 나누다 보면 나를 건드리고 간 실체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긍하거나 안도하거나 감탄하게 된다.
시인의 말이 감탄을 완성한다.
언제부턴가 내 눈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다.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2001년 4월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은 깨어난다는 것이다.
(2018-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