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의미에 대하여

by 숙제강박

얼마 전 차로 네 시간이 걸리는 먼 시골, 영덕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네 시간이면 부산도 갈 거리인지라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직선거리는 부산보다 훨씬 가깝지만 단지 부산보다 길이 좋지 않아서 오래 걸리는 곳이라고 어느 여행 블로그의 글에 적혀 있었다. 평소 장거리 운전과 교통체증을 병적으로 싫어했지만 아이에게 오랜만에 바다를 보여주는 것도 좋겠다 싶어 결정한 여행이었다.


이번 시골 여행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친구의 어머니가 혼자 사시는 집에 친구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다는 것. 그래서 여행 내내 신세를 지고 폐를 끼쳐야 한다는 것. 또한 여행지가 관광으로 유명하지도 않은 깡시골이라는 것과 원룸 같은 집을 여러 가족이 함께, 그것도 집주인인 친구 어머니까지 함께 이용해야 한다는 것. 나와 아내의 성향으로 봤을 때 이 여행은 이미 힐링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교통체증을 피해 새벽 5시에 길을 나섰다. 비몽사몽한 아이를 차에 억지로 욱여넣은 채였다. 아이를 고생시킬 수 없어 중간중간 휴게소를 몇 번 들러서일까 총 네 시간 반 정도가 지나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마을로 가는 길이 고즈넉했다. 수 백 년 묵은 고택들이 양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논두렁 사이에 곧게 뻗은 길은 끝이 없었다. 동네에서 가장 큰 나무 밑에 지어진 팔각정에서는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우리 차의 등장부터 퇴장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도착한 숙소는 울타리가 없는 작은 마당으로 둘러싸인 수더분한 단층집이었다. 먼저 도착한 친구 부부와 아이가 김장매트에 물을 받아놓고 잔디 위에서 첨벙거리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첫 집인지라 집에서 보는 경치에는 다른 집이 없었다. 마당 너머로는 옥수수 밭과 논이 펼쳐져있고, 저 멀리 마을 앞 큰길이 좌우로 길게 뻗어있었다. 그 길에는 한 시간에 한 대씩 초록색 마을버스가 천천히 지나갔다. 버스가 중간에 한 번 멈추고 가는 걸 보면 손님이 있긴 한가 보다.


서울 생활을 오래 하신 어머님은 시골 생활 2년 만에 까맣게 그을린 촌부가 되어있었다. 그 모습이 집과 잘 어울렸다. 우리를 먹이기 위해 시장 아주머니들에게 툭툭거리며 장을 보시는 모습이나 한 움큼 크게 양념을 퍼담아 물회를 무심히 저어 만드시는 모습에서도 시골생활이 느껴졌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잡초를 뽑았지만, 한낮에는 아무 일 없이 처마 아래에 앉아 커피를 즐기는 모습에서는 일조량에 맞춰 시간을 보내는 시골사람의 자연스러운 하루가 보였다.


압권은 마당이었다. 물이 나오는 호스 하나만 있으면 아이들은 꽃에 물을 주고 서로에게 물을 뿌리고, 무지개를 만들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른들은 저녁이 되면 마당에서 장작을 지펴 솥뚜껑에 고기를 구웠고, 나는 마당에서 전례 없이 여유로운 손세차를 즐겼다. 오죽하면 남자 어른들은 마당에 텐트를 치고 멀쩡한 집 대신 텐트에서 밤을 보냈다. 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만 보고 있어도 술이 들어갔다.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생활도 의외로 잘 맞았다. 가만있기 뭐해서 호미를 들고 마당과 텃밭의 잡초를 뽑곤 했다. 생각이 깊어지지 않고 몸이 단순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좋았다. 김훈 작가가 말한 도구와 노동과 나의 직접성을 느꼈다. 일하다 아이들이 심심해하면 아이들과 앵두를 따러 나섰다. 앵두를 잔뜩 따서 한 소쿠리씩 들고 돌아오는 길에 옆집 고택에 들러 송화차를 얻어마셨다. 어디를 걷든 길은 조용했고 길 옆 도랑에는 우렁이와 개구리가 있어 아이들이 즐거워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생애 최초로 휴식이라든지 힐링이라고 부르는 것의 진짜 의미에 대해 실감했다. 호텔과 펜션, 드라이브와 외식으로 점철됐던 기존의 여행에서도 나름 힐링은 얻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여행 막바지가 되면 역시 집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여행은 힐링이라는 세간의 상식이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대부분 이런 여행을 하니까 이게 제대로 된 여행이 맞겠지, 하는 생각도 근저에 있었다.


여행의 의미를 순간의 편함과 쾌락에서만 찾는다면 기존 여행도 여행답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조정하고 싶다면, 그래서 미래를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꿈꾸고 싶다면 그런 여행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내가 꿈꾸는 삶의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나와 맞는 건 어떤 건지 여행을 통해 검증해보는 게 내가 찾은 여행의 의미다. 영덕 여행 이후 나는 네이버 부동산에서 아파트 대신 단독주택을 검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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