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반짝이는 뫼비우스의 띠
기린 작가님은 천재다. 무명작가가 말하는 천재의 기준은 ‘노력으로 얻지 못할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몸이 부서져라 놀고,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앞이 안 보일 때까지 담배를 태우고, 외로움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과 대화하는 그녀는 예쁜 옷을 좋아하고, 맛있는 건 더 좋아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사랑한다.
사실 이제까지의 만난 유명인들은 모두 존경스러울 만큼 노력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분들이었다. 연출자들의 경우 촬영지에서의 강행군을 버텨내기 위해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보신하며 자신을 지킨다. 그런데 기린 작가님은 완전히 달랐다. 세상에 그냥 자신을 내 던져놓고 그 흥에 취해 글을 쓰는 게 아닌가 싶은 타고난 아티스트였다. 무명작가는 환생을 다섯 번 해도 갖지 못할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런 기린 작가님은 무명작가를 참 예뻐라 했다. 조련도 잘했다. 운전이 시키고 싶으면 지시하는 게 아니라 “나 차 뽑았는데 무명이 너 타볼래?”라는 식으로 흥을 북돋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서처럼 잔심부름을 많이 했던 모양새지만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몰랐거니와 심지어는 즐거웠다. 자력으로는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새로운 생활이 이어졌고 함께 있는 동안 진심으로 기뻤다. 참으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기린 작가님은 유난히 대본으로 애를 태웠다. 결코 쉽게 대본을 넘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무명작가에게도 본인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절대 한 번에 많은 대본을 주지 말 것, 대본을 재촉하면 편성받아온 뒤에 얘기하라며 거절할 것, 마감으로 독촉하면 캐스팅은 했냐고 물을 것. 무명작가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지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다. 새삼 상기시켜보자면 무명작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약자일 뿐이다.
어쨌거나 밀당의 고수인 기린 작가님이 천재라고 느껴지는 순간은 대본을 받아볼 때다. 하느님보다 만나기 어렵다는 40여 장의 대본을 읽고 나면 마음이 살랑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대사 하나에 코끝이 찡해지고 장면 하나에 그림이 그려진다. 매일을 저렇게 즐겁게 사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이런 바보 같은 의문이 들 때쯤 기린 작가님이 한소리를 했다.
“어유 멍청한 년. 넌 그렇게 살면 글 못 써.”
고백하자면 무명작가의 라이프스타일은 매우 무미건조하다. 유흥이라 봐야 노래방이 고작이고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는 법 따위 없다. 기껏해야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취미의 전부다. 기린 작가님은 그런 무명작가의 라이프 스타일을 꼬집은 것이다. 많이 놀아봐야 글을 가지고 놀 수 있다고, 다양하게 겪어야 각기 다른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고, 기린 작가님은 허구한 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재미없게 사는 작가다. 책을 통해 훔쳐낸 타인의 경험을 캐릭터에 녹이고 겪어보지 못한 인생을 더듬어가며 이야기를 짠다. 나의 일상을 드라마로 만들어놓으면 1%대의 시청률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언제나 기린 작가님을 동경했고 부러워했다. 닮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배운 점은 분명히 있다. 드라마 작가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술 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재미있는 건 기린 작가님은 무명작가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런 말을 던졌다.
“무명아, 넌 매일 글을 써. 안 그럼 나처럼 된다.”
그렇다. 결국 엉덩이 싸움도 무시할 수 없는 덕목이다. 기린 작가님은 코웃음을 치시겠지만 이쯤에서 1대 1 무승부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