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비겁하게 나는, 나무늘보의 연애담을 미끼로 눈길을 끌어볼까 한다. 기껏해야 시시한 10대의 연애담이나 읽자고 이 글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건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기쁘게 공부하는 법’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많은 학부형들이 이 시기 아이들의 연애를 부정적으로 복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철이 없고, 아직 쿨내를 다 버리지 못했으며, 사랑만큼 즉각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 믿는 나는 나무늘보의 연애를 꽤 오래전부터 바래왔다. 하지만 본인의 표현을 빌어 ‘찐따 같던’ 초등생 시절에는 연애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기대할 바가 아니었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자연스럽게’ 친구 사귀는 법을 알아가느라 감히 이성교제에 눈을 뜰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1학년을 마칠 즈음의 겨울방학, 아이는 처음으로 고백할 일이 있다며 놀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연을 풀었던 건 맛집으로 소문 난 제법 유명한 우동가게에서의 일이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일도 호들갑스레 전하는 아이의 성향을 감안해, 나는 ‘대단할 것 같이’ 포장하는 아이의 말보다 눈 앞의 카레우동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나무늘보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카레우동에 얹어진 새우튀김에서 시선을 떼고 나무늘보를 바라봤다. 어둡고 노란 조명 아래에서도 녀석의 얼굴이 빨개져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동아리 활동에서 알게 되었다는 여자아이의 이름은 얼굴만큼이나 예뻤다. 녀석은 말도 못 섞어본 여자아이에게 반해버렸고, 이후 치지 말아야 할 사고를 쳐 버렸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고백을 해 버린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답장은 거절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는 또 한 번, 아이들의 마음이 참 예쁘다고 느꼈다. 나무늘보가 상처라도 받을까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장문의 답신 덕분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의 고백이 성가실 법도 한데, 상대방은 따뜻하고 세심하게 자신에게 호감을 표해준 이에게 예를 다 했다.
지금도 아이는 이때의 일을 입에 올리면 혼자 하이킥을 찬다. ‘그때 그건 내가 아니야’라는 자기 부정도 잊지 않는다. 그때의 일이 ‘뻘 짓’이었음을 깨닫고 있다는 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라고, 나무늘보의 엄마인 나는 나름 위안을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