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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덕생 Oct 19. 2024

‘악마의 제단’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다.

아! Pulpito Del Diablo (5100m)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의 산행은 어제 보다 더욱 기대가 된다. 순백의 하얀 설산 위에 우뚝 솟은 화강암 제단, 그것도 이름하여 ‘디아블로(악마)‘라는 이름을 가진 화강암 기둥을 보러 가는 것이니 말이다. 산장 주인의 차를 타고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향했다. 어제의 코스보다 좀 더 이름이 알려져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출발지에 북적인다. 가이드로부터 오늘 먹을 점심을 넘겨받아 배낭에 넣고 길을 나선다. 날씨가 조금 심상치 않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은 어제보다 거리는 짧지만 좀 더 가파른 코스가 될 거란다. 해발고도도 어제보다 500미터가 더 높고 여러 개의 호수가 있는 Lagunillas Del Campanilla ( ‘라구나’가 호수이고 ‘라 구닐라스’는 ‘라구나’의 복수, 여러 개의 호수를 의미한다고 한다.)를 지나 급격한 경사를 오르면 ‘풀피토 델 디아블로’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날씨는 고도가 높을수록 점점 심각해진다. 우리의 가이드는 판초 우의를 준비해 왔지만, 우리는 달랑 레인 쟈켓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인 쟈켓의 방수 기능은 한계점에 이른다. 우박과 진눈깨비를 곁들인 빗물이 눈, 코, 입 주변을 적시고 조금씩 뼛속까지 한기를 몰고 오면서 주변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견딜 만 하기에, 그리고 아들의 일정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생각에 꿋꿋이 한보 한보를 내딛고 있는데, 아들이 먼저 중도 하차 이야기를 꺼낸다. ‘어쨌든 너의 결정에 따른다’고 답을 하니 아들이 가이드와 의논을 주고받는다. 우리가 온 거리는 3km 정도가 되고 앞으로 5km 정도를 더 가야 목적지에 이른다고 한다. 돌아가야겠다고 하니 조금 더 가면 호수가 나오니 그곳까지 가서 돌아가자고 가이드가 제안했다고 한다. ‘오케이’ ‘렛츠 고’… 맑은 날이며 일곱 색깔 무지개 빛이 보인다는 ‘ Laguna La Pintada ( ‘라구나’는 스페인어로 ‘호수’라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고, ‘핀타다’는 ‘페인팅‘이란 뜻이다.)’. 작은 호수에 흐린 날씨 탓으로  희뿌연 물색깔만 보인다. 거칠게 뿌리는 우박과 빗방울 너머로 멀리 큰 물줄기가 쏟아 내리는 산이 보인다. 저 산을 오르면 우리가 보고 싶어 했던 ‘Pulpito Del Diablo’가 있겠지만 악천후 날씨에 준비 없이 덤빈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돌아서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 등반길에 오르는 여러 팀들을 만났다. 그들은 비닐로 감싸고 나름의 준비가 된듯하다. 내가 비록 끝까지 못 갔지만 모두가 성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신발도 젖었고, 전신이 홀딱 젖어 한기가 엄습한다. 그래도 움직일 때는 운동의 열기로 인해 몰랐는데, 정지 상태의 몸은 젖은 옷의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덜컥 걱정이 앞선다. 가이드가 산장에 연락을 취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가이드가 이곳에 대기 중인 차량을 교섭해 보겠다고 한다. 몇 페소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산장까지 가는 걸로 하여 거래를 마무리 짓고 차에 올랐다. 차가 꽤 좋아 보인다.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멀쩡한 차량인 것 같다. 아침에 왔던 길을 되돌아 산장에 도착했다.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싶은데, 바람 때문에 화덕에 불을 못 피운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숙소에서 담요를 가지고 와서 온몸을 칭칭 감고 몸을 데운다. 산장에서 내어 준 따뜻한 수프로 속을 데우니 그래도 한결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산장에 내어준 커다란 신발과 양말로 대체한다. 몸은 비록 춥고 힘들어도 산장에서 보는 저 너머의 안데스 산맥 설산의 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다. 산장 주인도 이런 풍경은 자주 보지 못한다고 한다. 비는 이제 좀 거치는 것 같고.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어 마을로 내려왔다. 구름을 끼고 있는 산허리 아래로 아담하게 펼쳐지는 ‘엘 코쿠이’ 풍경 또한 한 폭의 수채화로 내 추억의 렌즈 속에 한몫을 보탠다. 마을로 내려와 첫날 산장으로 가기 전에 잠깐 들렀던 작은 호텔 ( 호텔이라고 칭하지만 우리나라 옛 여관 정도의 수준으로 보면 된다)로 들어가 젖은 옷도 말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오늘밤엔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 보고타행 버스를 탈 예정이다.


산장 주인이 가까운 곳에 온천이 있다고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한다. 덜컹거리는 산장 주인의 차를 타고 20여분을 달리니 몇 가구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는데, 작은 대문을 빼곡히 열고 들어 가니 노천 온천이 있다. 아무도 없다. 우리의 전용 온천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마시는 한 캔의 맥주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하기만 하다. 오래되었지만 하얀 담장에 스페인식 기와가 올려져 있는 풍경이 나름 운치가 있다. 온천으로 몸을 풀고 우리는 ‘엘 코쿠이’로 돌아와 다시 작은 동네를 헤집고 다닌다. 다니다 보니 우리네 시골 어귀의 사랑방 같은 음식점을 발견했다. 동네 사람들이 술 마시며 카드놀이도 하고, 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간단히 요기도 하는 그런 식당이었다. 요즘 흔히 유행하는 ‘노포’ 바로 그것이었다. 내일 아침은 버스를 타기 전에 이곳에서 요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돌다 돌다 동네 골목의 한적한 음식점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가 송어 구이랑 감자… 이것저것 몇 가지가 되었는데, 손님이 보이지 않는 식당치고는 맛이 깔끔하고 괜찮았다. 여행사 사무실에 들러 마지막 결산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가 쉴 요량으로 필요한 것을 사러 구멍가게에 들렀다. 이곳에는 구멍가게들이 참  많은데, 우리 시골 동네 어귀의 구멍가게처럼 이것저것 생필품들을 팔면서 간이주점을 곁들이는 것 같았다. 마침 우리가 들런 구멍가게에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술판을 벌리고 있었다. 그분들 중에 한 분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의 여사장님의 남편 분이라며 술을 권한다. 우리의 소주 비슷한 ‘아구아르디엔테(Aguardiente : 스페인으로 ‘불타는 물’이라 뜻이며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알코올로 만드는 알코올 도수 24~29도 술이라고 하니 우리의 소주랑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술 좋아하는 내가 체면 차리지 않고 얼른 받아 마시니 이 사람, 저 사람 끊임없이 술을 권하며 사진도 찍고, 속된 말로 난리가 아니다. 심지어 호텔 사장님 남편분은 여행사 사장에게 이리로 오라고 전화한다. 작은 동네이니, 연배가 있으신 분의 권력(?)에는 뭐든지 통하나 보다. 마치 옛날 우리 시골동네의 아버지 세대들께서 저녁나절 시간을 보내시든 그런 모습이랑 유사하여 친근감이 더해졌다. 내가 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이 스페인어로 그분들에게 전해 주었고 그분들은 기분이 좋으신지 술을 더 권한다. 주거니 받거니 몇 순배가 더 돌아가는 중에 여행사 사장이 이곳으로 왔다. 아들이 마무리 결산을 끝내고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짐을 모두 싸들고 호텔 여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어제 우리가 점찍어 놓은 식당으로 갔다. 역시 우리의 예상대로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사람들이 들러 요기를 하고 가는 ‘노포’였다. 이곳은 단 두 가지의 음식만 있는데, 닭고기 국물에 통감자를 넣어 끓인 수프(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콜롬비아의 솔푸드 ‘운 칼디토’인 듯하다.)와 옥수수 껍질 속에 옥수수 분말인지 구아바를 넣어 찐 음식( 나중에 찾아본 결과 ‘타말’ 일 것 같다.)이 나왔다. 보잘것없는 시골 노포에 보잘것없는 식사 같지만 이곳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는 음식 같아서 내 영혼의 작은 조각 하나를 이곳 안데스 ‘엘 코쿠이’에 두고 가는 느낌이다. 다시금 하루의 반이란 시간을 고산준령의 꼬불 길을 달려 보고타에 도달하면 이 여정도 마무리된다. 늦은 저녁에 보고타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비행기에 오르면 남미의 여정이 끝난다.

왼쪽 부터 : 첫날 큰호수 등반길에서 바라본 Pulpito del Diablo,  Pulpito del Diablo로 가는 산행 초입에 세워진 표지판
맑은 날엔 일곱 색깔로 비친다는 ‘Laguna La Pintada’
 능선만 넘어면 ‘Pulpito del Diablo’인데 중도 포기하고 돌아선 전환점 그리고 산장으로 돌아와 두겹의 담요로 몸을 녹히고 있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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