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친절
직장에서 연락이 왔다. 휴직을 연장할지, 복직할지 결정해서 서류를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올해, 아기를 가지지 못한 채 휴직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그렇다고 건강이 좋아졌는지 돌아보면, 그렇지도 않다. 시험관 하느라 몸도 많이 힘들었다. 인생에 여백이 있어도 좋다고, 쉬어가도, 돌아가도 좋다고 그렇게 쓰고 나에게 설득했지만 내 마음은 쉽사리 동의를 하지 않는다. '괜히 멋지게 말만 포장한 거지, 너 사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 아니야?'
나는내면의 목소리와 싸워야 했다.
'그렇지 않아. 네가 만약 일을 하면서 시험관을 했으면 네 몸이 제대로 버텼겠어? 배아 이식하면 계속 누워있어야 하는데 직장에서 그러기 쉽지 않았을 거야. 휴직하면서 좋았던 점들을 생각해 봐.'
사람은 참 우습다. 쉴 수 있는게 얼마나 감사한데, 난 나에게 있는 결핍을 본다. 늘 그런 것 같다. 난 내게 참 좋은 점이 많은데, 나의 결핍을 본다. 그 결핍에 괴로워한다.
선택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모든 선택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난 선택의 장점만을 취하고 싶어한다. 단점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것인데. 어느 누가 선택에서 장점만 쏙 골라 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인생은 완벽하지 않고, 모든 선택에도 기회비용이 있음에도 난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내 자신을 몰아세운다. 내가 선택한 것에 관해 의심하고, 닥달한다. 난 그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음에도 말이다.
남편과 대화를 통해 내년 휴직을 연장하기로 했다. 내년 복직을 하면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커 보였다. 휴직 연장을 위해서는 진단서 발급이 필요하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분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이름을 말하고 생년월일을 말한다. 내 진료기록을 보시더니, 간호사님께서 말씀하신다.
"지난번에 병원 진료 기록을 발급받으시고 다른 병원으로 간다고 하셔서, 원장님께서 진단서를 떼어 주시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쿵, 가라앉았다. 시험관 3차 실패 후, 나는 너무 속상하고 올해 휴직이 끝나기 전까지 임신이 되어야한다는 마음에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보고자 진료기록을 발급받았었다. 이제 나는 그 병원 환자가 아닌가 보구나. 지금 어떤 직장에도 소속되지 않은, 병원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그네와 같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나도 불안했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뗄 용기가 있을까? 두려웠다. 세상은 너무나도 커지고, 난 너무나도 작아졌다.
점심을 먹고 1시간 가량 운전해서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사분께서 물어보신다.
[간호사] "다른 병원 가기로 한 것 아니세요?"
[나] "서울로 병원을 가려고 했는데 아직 병원을 못 정했어요. 서울까지 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간호사] "알겠어요. 우선 기다려보세요."
괜히 난 이 병원 손님이 아닌 것 같아 위축된다. 초조하게 의자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린다. 혹시 원장님이 차가운 눈빛으로 날 대하면 어떻하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이런 사소한 것 가지고 울면 부끄러울 것 같아 참는다. 내 앞에 5~6분 정도 환자분들이 다녀간 후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이름이 불린다.
원장님실에 들어가 원장님을 봤는데, 내가 두려워하며 상상했던 그 표정이 아니었다. 따뜻하게 웃으며 날 맞아주셨다. 약간 멍했다. 회사에 제출할 진단서를 쓰냐며, 진단서 문구도 같이 확인해 주셨다. 난 서투른 미소를 띠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원장실을 나왔다. 원장실을 나오는데, 본인 입장에서 굳이 안 써주셔도 될 진단서를 써 주신 원장님, 따뜻한 미소로 날 바라봐주신 원장님의 친절에 마음이 너무나도 따뜻해졌다. 사실,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되는데.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만 해도, 세상을 사는 게 너무 두렵고,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웠는데.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것 같다. 세상에는 좋은 분들도 참 많다. 오늘 원장님의 친절에, 마음이 환해진다. 사실 시험관 1차에서 3차까지 하면서 원장님께서 너무나도 잘 해 주시고, 실력도 좋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컸다. 결과가 어떻든, 원장님께서는 최선을 다 해 주셨고, 나 또한 아기를 가지고자 최선을 다 했기 때문이다. 생명은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기에.
하루를 돌아보니, 원장님께 감사한 마음이 점점 더 커진다. 나도 실력과 인성을 갖추어,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과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원장님, 오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제가 아기 낳으면 원장님께도 꼭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