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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도, 책임도 어렵다

난임 휴직을 보내며

by 햇살샘
선택할 때까지는 신중하게 고민해서 선택하고, 선택을 한 후에는 후회하지 마라.


엄마가 나에게 늘 하시는 말이다. 난 여전히 선택이 참 어렵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참 어렵다.


2020년, 난임 휴직을 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여러 번 후회했다. 지금 난임 휴직을 하고 아기가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일들을 해낸 것도 아니다. 당연히 아기 가지는 일에 집중해야 했기에, 다른 일들은 어정쩡하게 할 수밖에 없었고...(건강에 무리가 갈까 봐). 건강을 돌보는데 집중하려 했으나, 시험관 시술을 하면 건강이 축나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시험관 시술을 하고 나서 아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난임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어리석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번 주는 참으로 마음이 힘들었다. 난임 휴직을 하지 않았을 경우, 할 수 있었을 것들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난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 선택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 난임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작년에 학교에서 부장교사를 제안하셨으니 승진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까?

* 내가 좋아하는 영어를 가르치며 온라인 수업의 대가가 되어 있었을까?(그렇게 해서 책도 내고, 유튜브로 멋진 영어 수업 영상도 찍으면서 영향력 잇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 난임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수업에서 한 내용으로 소논문을 쓸 수 있었을까?


다 부질없는 욕심이다. 이 질문은 조건부를 바꾸어야 한다. '난임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이 아니라 '아기를 갖지 않기로 했다면'인 것이다. 학교에 다녔더라도, 아기를 간절히 원했다면 시험관 시술을 했을 것이고 이것저것 병행하면서 삶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를 병행할 수 있었겠지만, 내 몸이 잘 견딜 수 있었을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난 난임 휴직을 선택했다. 영어의 가정법에나 나올만한 위의 질문은 참 어리석은 질문이고, 아무런 영양가가 없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주 동안 이 질문들로 너무나도 괴로운 한 주를 보냈다. 그렇다면 난 왜 이렇게 무엇인가를 해 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가? 승진을 해야 할까? 유명한 선생님이 되어야 할까? 논문 점수를 쌓아두어야 할까?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교사로 살기로 했으면 훌륭한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과, 교사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기에 교사를 그만두더라도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공존한다.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마음과, 아기를 꼭 낳아야 할까? 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어렸을 때 되고 싶었던 교수, 교수가 되고 싶은 마음과, 그러기에는 나이도 있고 유학도 다녀오면서 새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기에 그 에너지로 다른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책도 쓰고 유명한 강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소위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부질없다는 마음이 공존한다.


내가 욕심이 많은 것일까? 어렸을 때는 꿈을 가지라고 그러면서 어른이 되어 꿈을 꾸면, 욕망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는, 꿈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어른이 되면 타협하라고 한다. 그런데 내 꿈이 꿈일까? 욕심일까? 욕망일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어제는 수능이었다. 수능은 학창 시절을 소환한다.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했었고 상위 1%만 갈 수 있다던, 조금 커트라인이 높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전국에서 학생들이 우리 학교로 왔다. 워낙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고, 농촌 출신인 난 거기서도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 시절, 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고 잠도 몇 시간 안 자면서 공부했다. 선생님들의 기대도 컸다. 그러나 난 수능을 망쳤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공부한 만큼 왜 잘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에너지 효율에서 보면, 반드시 손실되는 양이 있듯, 내가 공부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명문대를 가는 것을 보며 조금 부러워했다. 물론, 교육대는 우리 집 형편에 가장 알맞은 대학이었고, 정말 좋은 대학이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도 감사하다. 그러나 SNS를 통해 가끔씩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면 위축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미국에서 벌써 과학자가 되어 교수의 길에 들어선 친구도 있다. 미국에서 의사가 된 친구도 있다. 한국에서도 의사를 하면서 조교수가 된 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고 난 나다.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보도 충분히 훌륭해요. 멋진 선생님이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잖아요."


라고 격려를 해 준다. 고마운 남편이다. 맞는 말이다. 각자의 직업은 다 소중하지 않은가? 그리고 선생님이 된 것은 지금도 감사하다(비록 좋은 선생님이 되는 과정은 뼈를 깎는 아픔이 따르지만).


어떻게 보면, 난 너무나도 세속적인 기준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쟁 사회에서 자라온 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잠재의식 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1등을 해야 인정받는 세상 속에서, 1등을 하는 것도, 그렇지 못하는 것도 너무나도 피곤한 일이다. 1등은 1등을 놓칠까 봐 두렵고, 1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 힘들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경쟁이 패러다임에서 나 자신을, 내가 놓아주고 싶다.


생각이 뺑글 뺑글 돌아,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시간을 거슬려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난 역시나 내게 없는 것에 욕심내고 있었구나.... 결핍을 보고 있었다. 휴직이라 주어지는 많은 선물들을 보지 못하고,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했다.


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좋은 것을 누리고 싶었나 보다. 난 그렇게 잘난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인정받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사람들의 인정을, 박수를 받으면 행복할까? 꼭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또다시 뭔지 모를 공허함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으며, 욕망하며, 괴로워하고 있지 않을까? 끓임 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이다. 박사학위를 따기 전에는, 박사가 되면 뭔가 안정될 것 같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것 같고, 학교 생활이 좀 더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똑같았다.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한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난, 그냥, 나인 것이다.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성취, 나의 과거, 나의 어떠함.. 이것은 이미 과거이고, 지금의 난, 그냥 나인 것이다.


부푼 풍선에 바람이 빠진다. 그래, 난 티끌과 같은 유한한 인간이야. 잠깐 왔다가 잠깐 이 땅에 머무는 것인데, 왜 그렇게 안달하니? 물 흐르는 대로 사는 거야. 아기도 하늘의 뜻이면 가질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또 감사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인가가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다만 하루하루를 소중히 잘 가꾸어 가면 되는 것이고.


난임 휴직 기간을 돌아본다. 눈에 보이는 뭔가가 없더라도, 나에게는 쉼의 시간이 주어졌고, 이것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남편은 덕분에, 긴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었고, 더 건강해졌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소소하지만 브런치에 글도 쓸 수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산책하며 힐링을 할 수 있었다. 만약, 학교를 다니면서 시험관 시술을 했다면, 몸이 훨씬 더 축났을 것이다. 쉬면서 회복되니 얼마나 감사한가!


생각이 돌아, 돌아, 다시 현재로 왔다. 정말 많은 욕심들을 덜어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역시 욕심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나 보다. 난, 내가 뭔가를 잘하지 않아도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소중한 존재이다. 무명한 사람이지만 존귀한 사람이다. 아기를 낳든, 낳지 못하든, 난 존귀한 사람이다.


"괜찮아.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하지 않아도, 넌 그 자체로 소중해."


내 존재를 증명하려고 몸부림 치치 않아도 괜찮다. 오늘은 내가 날 안고 토닥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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