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출근
아직 차가운 숨이 남아 있는 봄날의 첫머리였다. 밤새 내린 가는 비가 그친 뒤라 골목은 더 깨끗해 보였고, 아스팔트 위에는 새벽 공기를 닮은 얕은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전봇대의 얇은 선들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이 옆집 금속 간판을 흔들어 은은한 진동음을 만들었다. 우체국 담벼락 아래에는 한겨울을 견딘 담쟁이가 작은 주름을 펼치듯 새순을 내밀고 있었고, 가게 앞 포스터는 모서리가 말려 하얀 풀자국을 드러내며 봄빛을 붙잡고 있었다.
도윤은 우체국 출입문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등을 스치는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사이로 미세한 단내가 섞여 들어왔다. 모퉁이 빵집에서 갓 구운 식빵과 크루아상이 식는 냄새였다. 그는 양쪽 손을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발끝을 맞붙여 천천히 바닥을 문질렀다. 신발 밑창이 젖은 시멘트를 스치는 소리가 작게 일렁였다. 벤치 위에 떨어지는 빛은 복도 창문을 통과하며 길게 늘어졌다가 문이 열렸다 닫히는 리듬에 맞춰 조금씩 진폭을 바꾸었다.
“언젠가 편지로 다시 만나자.”
그 말은 오래전에 떠났지만 이상하게 소리가 되어 남아 있었다. 마음 깊은 곳, 스위치를 올리면 켜지는 낡은 탁상 라디오처럼 언제든 재생되는 문장. 윤하의 목소리는 사실 또렷하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에 붙어 있던 공기의 온도, 그날 오후의 습도, 종이 위에 잉크가 마르는 동안 일정하게 떨어지던 시계 초침의 속도가 함께 떠올랐다. 그것들이 하나로 묶여 ‘나중에’라는 말의 지도를 그려 주었다. 나중에, 어디선가, 편지로.
우체국 문을 밀어 열자 종이 가볍게 울렸다. 오래된 스프링이 들어간 문종은 열릴 때보다 닫힐 때 조금 더 낮은 소리를 냈고, 뒤이어 난방기에서 내뿜는 바람이 유리문 안쪽에 얇게 입김을 만들었다 사라졌다. 실내에서는 젖은 골목의 냄새 대신 종이와 풀, 잉크와 셀로판테이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창구 앞 바닥에는 줄을 기다린 사람들의 발자국이 엷게 눌려 있었고, 안내 표지판에는 ‘소포는 3번 창구’라는 글씨가 붉은 펜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천장 형광등의 미세한 윙 하는 소리가 유리 진열장, 투명한 우표 케이스, 계산대 금속 모서리를 돌아 살짝 높은 음으로 반사되었다.
“아침 일찍 왔네, 도윤 씨.”
2번 창구의 박 주임이 투박한 머그컵을 들어 보였다. 컵 겉면의 파란 고래 그림은 여러 번 설거지를 거치며 이미 색이 조금 벗겨져 있었다.
“네. 날이 풀릴 듯 말 듯해서요. 바람이 미지근해지면 배달이 조금 수월해질 것 같아서.”
말을 마치며 도윤은 캐비닛 상단의 배달 가방을 내렸다. 천 가방은 세탁을 반복하여 결이 더 단단해졌고, 외측 포켓에는 작은 연필과 접지 칼, 투명한 구멍테이프가 꽂혀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짧은 공기가 가방 속 우편물 사이를 스치고 나가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종이가 종이를 부딪칠 때 나는 미세하고도 단정한 마찰음 누군가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려 움직일 때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분류대 앞에 서자 오늘의 동선이 지도처럼 펼쳐졌다. 우편번호가 적힌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들이 번호 순으로 깊이를 달리하며 놓여 있었고, 바구니마다 골목 이름들이 종이 꼬리표로 꽂혀 있었다. ‘연등로 12길’, ‘서향2로 5가’, ‘매봉3길 17’. 지명들은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동네의 닉네임 같았다. 어느 길은 여름이 되면 은행나무가 먼저 그늘을 만들고, 어느 골목은 장마가 시작되면 늘 첫 번째로 물이 차며, 어느 언덕은 겨울마다 자꾸만 누군가 미끄러졌다. 이름만 보아도 그 거리의 계절과 습관이 떠올랐다.
도윤은 먼저 등기와 소포를 갈랐다. 등기는 분류대 위에 오른쪽으로 치우쳐 쌓고, 소포는 바닥에 놓은 대차에 세로로 세워 나란히 바꿔가며 배치했다. 박 주임이 슬쩍 다가왔다.
“어제 남쪽 라인에서 반송이 좀 있었다지? 주소가 통째로 바뀐 곳이 있나 봐. 재개발 얘기가 나오더니 빨라졌어.”
“네. 표지판도 바뀌고, 골목 입구에 공사 가림막도 생겼어요. 그 안쪽까지는 아직 그대로인데, 마치 족적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발자국만 남아 있는.”
박 주임은 ‘족적’이라는 단어에 잠시 눈썹을 올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자국이 남아 있는 동안은 찾아갈 수 있지. 남아 있는 동안은.”
그는 말끝을 허공에 묶어 두듯 가볍게 웃으며 돌아갔다. 혼자 남은 분류대 위로 형광등 빛이 내려앉았다. 도윤은 작은 연필로 봉투 모서리에 표시를 달았다. 오래된 단독주택, 늘 부재가 잦은 2층, 초인종이 고장 난 상가 3층, 낮에는 문 닫는 카페. 봉투 위에다 직접 쓸 수는 없어서 손끝의 힘으로만 기억했다. 이 봉투는 13시 이후, 이 소포는 11시 이전, 이 등기는 우체함이 아니라 꼭 손에 전해 주기. 배달은 종종 지도가 아닌 사람의 생활시간을 따라야 했다. 그는 그 사실을 배운 뒤로 길을 읽는 법이 달라졌다. 건물의 높이와 도로의 폭, 횡단보도의 길이보다 한층 더 얇은 층위에서 움직이는 시간의 방향을 읽으려 했다. 편지는 언제 도착해야 가장 편지답게 도착하는지, 그것을 생각했다.
우체국 뒤편 창고에서 자전거를 끌어냈다. 빨간 도색은 해를 여러 번 맞아 색이 옅어졌고, 뒷바퀴 흙받이에는 작년에 붙인 반사 스티커가 아직 반짝였다. 손잡이에 매달린 작은 종을 살짝 흔들자 맑은 소리가 났다. 어릴 적 골목을 질주하던 오빠들 뒤를 따라가며, 그 종소리를 멀리서 듣고도 방향을 알 수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종소리는 소리의 그림자를 가진다 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배달용 장갑을 끼며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 시 사십오 분.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한낮 기온이 열세 도까지 오른다고 했다. 장갑의 재봉선이 손등을 타고 지나갈 때 약간의 조임이 느껴졌다. 손목을 굽혔다 폈다 하며 그는 코트 단추 하나를 풀었다. 몸에서 빠져나온 열이 카라 사이로 올라왔다.
우체국을 나와 첫 번째 코너를 돌 때, 골목길 작은 꽃집의 유리문이 열렸다. 사장님은 화분을 바깥으로 두 개, 세 개 꺼내 놓다가 그를 보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연초록 에크메아 잎사귀의 가장자리에 진주 같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꽃집 앞을 지날 때마다 도윤은 조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흙 냄새와 잎맥 사이로 오르는 수분의 냄새, 꽃포장지에서 나는 칼날 냄새 같은 비닐의 얇은 향. 어떤 편지는 봉투를 열기도 전에 향으로 먼저 읽힌다는 걸, 그때마다 떠올렸다.
‘오늘은 어디서부터 갈까.’
그는 늘 그 질문으로 하루의 첫 발을 내디뎠다. 지도는 늘 정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길 위의 사소한 표정들이 그에게 부지런히 힌트를 건넸다. 소규모 공사장에서 쌓아 올린 모래 더미의 경사, 전날 내린 비가 아직 마르지 않은 구간의 윤기, 오전 장을 본 사람들이 끌고 지나간 카트 바퀴의 얇은 자국. 그것들을 잇다 보면 유난히 조용한 시간대의 골목이 보였고, 그 골목에 사는 노부부의 낮잠 시간을 피해 종이 우편을 넣을 수 있었다. 소리, 냄새, 빛 편지는 늘 사람의 일상을 가로지르지 않고 스며들어야 했다.
그가 방향을 정하려던 바로 그때, 반대편 인도에서 늙은 개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왔다. 하얀 수염이 입 가장자리에 수북이 나 있었고, 눈은 크고 얕게 젖어 있었다. 개는 도윤의 자전거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움직여 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개의 체온은 놀랍도록 따뜻했고, 손바닥에 닿는 털은 부드럽다기보다 약간 거칠었다. 개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오래된 것들의 보폭은 대개 정확하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여유가 한 칸 남는다. 편지도 그랬다. 마음이 서두르지 않을 때 가장 멀리 갔다.
첫 번째 배달지는 연등로 12길 9. 오래된 이층집들이 서로 맞닿아 작은 안쪽 마당을 만든 골목이었다. 계단의 첫 단은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아직 반짝거렸고, 두 번째 단은 누군가의 발자국이 건조시키고 있었다. 삼단째에 도착했을 때 쌓여 있던 전단지 묶음이 바람을 타고 살짝 넘겨졌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우편함 뚜껑을 살짝 올려 조심히 편지를 밀어 넣었다. 금속 뚜껑이 닫힐 때 나는 짧고 무거운 소리가 오전의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소리를 등 뒤에 둔 채 내려올 때, 마당 구석의 화분에서 뚜껑 같은 잎 사이로 아주 작은 새순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것들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었다.
두 번째 배달지는 서향2로 5가의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잦아 한 층을 더 걸을 때가 많았다. 계단참에서 마주친 어린 소년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음악을 듣는 듯했지만, 입술은 가만히 어떤 영어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눈빛은 낯설게 반짝였고, 그의 어깨가 계단 난간을 스치며 내려갈 때 작은 소리가 났다. 소년은 그에게 먼저 인사했다.
“아저씨, 오늘은 소포 많아요?”
“오늘은 편지가 더 많네.”
“편지는 좋죠. 우체함 열면 종이 냄새가 나요. 비 오고 난 날에는 더.”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소년의 발소리가 아래층으로 사라질 때까지, 도윤은 잠시 난간에 손을 올린 채 서 있었다. 비 온 날의 종이 냄새— 그는 그 말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윤하의 이름을 떠올렸다. 어느 해 여름, 비가 쉬지 않고 내리던 오후. 창문틀에 팔꿈치를 걸고, 젖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녀가 적어 내려가던 짧은 문장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종이를 살짝 기울여 잡던 버릇. 그녀의 글씨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주소를 지나며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골목을 지나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신호등의 초록 사람이 여섯 번 걸었다. 횡단보도 끝에서 그는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한 번씩 살짝 잡아 바퀴의 감촉을 확인했다. 움직임에 대한 확인은 늘 안심을 데려왔다. 한낮으로 넘어가는 빛은 옅어졌다. 그림자들은 제자리를 잠시 옮기며 서로의 경계가 흐려졌다. 햇빛 아래 노출된 우편함의 금속 표면은 뜨겁게 데워졌다가 바람에 식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 열의 높낮이를 측정하듯 지나쳤다.
점심 무렵, 우체국 근처 작은 국숫집에 들렀다. 유리문 안쪽에서는 김이 하얗게 올라왔다. 국물이 나오는 동안 그는 배달 가방의 지퍼를 반쯤 열어, 다음 동선의 봉투들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면발을 건져 올리는 젓가락 끝에서 국물이 길게 흘렀고, 그 길을 따라 김이 가벼운 연필선처럼 공중에 그려졌다. 젓가락을 놓고 물을 마신 뒤, 그는 가방을 다시 닫았다. 문득,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안내하는 어떤 초점이 가슴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초점은 늘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그 방향의 이름이 윤하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초점이 흐려질까 봐 말하지 않았다.
오후 배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조금 더 느리게 시작되었다. 어린이집 앞에서는 노란 모자를 쓴 아이들이 줄지어 나왔고, 보도블록 위에 비친 그림자가 짧고 귀여운 발자국 모양을 만들었다. 슈퍼 앞에는 흰 플라스틱 의자가 두 개 놓였고, 햇빛은 의자 등받이 구멍을 통해 바닥에 타원형의 작은 빛들을 찍었다. 어느 집 초인종을 누르자 문틈 사이로 뜨거운 된장국 냄새가 흘러나왔다. 집 안 어디선가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깔렸고,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두 번,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편지를 건네며 그는 한 박자만큼 더 기다렸다. 손과 손이 닿는 순간, 종이의 체온이 옮겨 갔다.
해가 서쪽으로 약간 기울 때쯤, 우체국의 시계탑이 정각을 알리는 맑은 소리를 내었다. 그는 마지막 봉투를 우체함에 넣고, 자전거 바퀴를 돌려 우체국으로 돌아왔다. 바람은 아침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골목의 천장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 사이를 지나며 얇은 종잇장 같은 음을 만들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마음속에서 같은 문장을 꺼내 들었다.
“언젠가 편지로 다시 만나자.”
그 문장은 약속처럼 굳지 않았다. 다만 길 위에 얇게 깔린 빛 같은 것이었다. 밟을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종류의 빛. 그는 그 빛을 따라 걷고, 멈추고, 다시 걸었다. 편지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품고도, 이상하게 걸음은 가벼웠다. 누군가의 하루를 그에게 잠시 맡긴다는 것, 그 믿음이 그의 등을 밀었다.
우체국 문을 밀고 들어오자 오후의 공기는 아침과는 다른 향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의 코트에서 빠져나온 햇빛 냄새, 종이 틈에 오래 머문 먼지의 향, 폐점 전 창구 정리에서 나는 뚜렷한 풀 냄새. 박 주임은 금고를 닫으며 손목을 한 번 돌렸다.
“오늘은 어땠어?”
“평소처럼요.” 그는 대답했다. 그 말 속에는 하루 종일 마주친 사람들의 온기와, 아직 닿지 못한 마음의 안쪽이 함께 들어 있었다.
분류대에 가방을 올려놓고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사각
하는 종이들의 낮은 합창이 손끝에 닿았다. 그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환풍기의 바람은 여전히 천장 어딘가에서 원을 그렸다. 문을 닫고 나올 때, 시계탑은 정각보다 한 박자 늦은 시간을 가리켰다. 저녁 공기는 낮보다 투명했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조금 더 밝아 보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우체국 현관 앞에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보랏빛이 서쪽 가장자리에 언뜻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 빛은 편지지의 여백을 닮아 있었다. 쓰지 않은 칸, 아직 쓰지 않은 말. 그 여백은 언제나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내일 아침, 문을 열고 들어오면 또다시 같은 냄새, 같은 소리, 같은 빛이 그를 맞이할 거라는 것을. 그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늘 사소한 것들이지만, 편지는 그 사소함을 가장 먼 곳까지 데려가는 일이라는 것을.
도윤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폐 깊은 곳까지 들어온 저녁 공기가 가볍게 떨며 내려앉았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배달할 것이다. 내일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 언젠가 편지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렇게, 봄의 첫머리에서 그는 다시 세상을 배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