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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을 찾는 일

편지는, 때로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이름이었다.

by 클래식한게 좋아

우체국의 오전은 늘 같았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리 진열대 위의 우표 케이스를 반짝이게 하고, 사무실 구석의 시계 초침이 묵직하게 돌아갈 때마다, 종이 냄새가 공기 중에 잔잔히 흩어졌다. 도윤은 그 평범한 리듬 속에서 매일같이 편지를 분류했다. 서류봉투의 바스락거림, 우체통을 비우는 동료의 발소리, 커피포트가 김을 내뿜는 소리. 그의 하루는 그 작은 소리들로 조용히 이어졌다. 편지의 무게는 다 다르지만, 손끝에 닿는 감촉은 언제나 비슷했다. 그 안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고, 도윤은 그 마음의 온도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날 아침도 별다를 것 없이 시작되었다. 분류대 위에는 갓 도착한 우편봉투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그는 습관처럼 손끝으로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봉투마다 사람들의 사연이 숨어 있었다. 서류봉투엔 누군가의 서류심사 결과가, 낡은 엽서엔 여행의 추억이, 얇은 봉투엔 누군가의 짧은 사랑이 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무심히 넘기던 한 장의 봉투가, 그를 붙잡기라도 하듯 시야 속에서 멈춰 섰다.


보내는 사람: 윤하. 그 이름을 읽는 순간, 시간의 결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형광등의 빛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듯했고, 어딘가에서 오래된 시계의 초침 소리가 느려졌다. 도윤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봉투를 바라보았다. 윤하. 그 이름은 잊은 적 없었지만, 이렇게 다시 눈으로 보는 건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글씨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둥근 자음, 살짝 눌린 모음, 그리고 마지막 획이 길게 밀려나듯 남겨진 여운. 그녀는 글씨를 쓸 때마다 언제나 한 호흡을 길게 남겼다. 그 호흡이 종이 위에서 쉬는 듯 머무는 그 필체를, 도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봉투의 표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얇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와 자신의 손끝이 맞닿는 느낌이었다.


지나간 시간들이 봉투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듯, 묘한 온기가 전해졌다. ‘정말 그녀일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대답을 알고 있었다. 글씨 하나로도 사람은 충분히 살아날 수 있다는 걸. 그날 오후, 도윤은 배달을 마친 뒤에도 귀가하지 않았다. 우체국 창고 뒤편, 오래된 탁자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바람이 스며드는 창틈 사이로 종이가 살짝 흔들렸고, 봉투 위로 기울어진 노을빛이 얇게 번졌다. 그는 기억 속에서 윤하를 천천히 불러냈다. 봄날의 벚꽃이 흩날리던 오후, 카페 창가에서 편지를 쓰던 그녀의 모습.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문장마다 생각을 멈춰 숨을 고르던 표정.


그녀는 늘 말했다. “편지는 말보다 느리니까, 마음이 따라잡을 수 있잖아요.” 그 말이 그때는 그저 예쁜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은 사라지지만, 편지는 남는다. 그리고 남은 것들이, 언젠가 사람을 되살린다. 도윤은 봉투의 뒷면을 살폈다. 붙여진 우표는 오래된 벚꽃 도안이었다. 벚꽃잎이 종이 위에서 금방이라도 흩날릴 듯 연하게 번져 있었다. ‘이 우표를 고르던 그녀의 손끝이 어땠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도윤의 하루는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히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수백 통의 편지 속에서 이름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분류대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보내는 사람’을 살폈다. 윤하. 윤하. 윤하. 글씨 하나, 획 하나에도 눈길이 멈췄다. 그녀의 필체와 닮은 글씨를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미묘하게 떨렸다. 다시 나타나지 않아도 좋았다. 그는 이제 기다림이 어떤 모양인지 알고 있었다. 우체국 안에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멀리 떠난 가족에게 안부를 전했고, 누군가는 이미 떠나버린 이에게 뒤늦은 편지를 썼다. 도윤은 그 편지들을 분류하며 생각했다. 편지는 단지 도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움이 흐르는 통로’라는 것을. 어느 날, 또 한 통의 봉투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받는 사람: 윤하.’ 발신인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주소, 그 주소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서울 ○○구 ○○로 14길.’ 그가 알던 그 거리였다. 지금은 재개발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고, 지도에도 이름만 남아 있는 장소. 그녀가 마지막으로 살던 동네였다.


그는 봉투를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주소를 따라 썼다. 글씨의 리듬이 마치 길을 안내하듯, 마음속에서 방향을 그렸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문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그 바람 소리가 어쩐지 그녀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머리맡에 둔 봉투가 미세하게 떨렸다. “편지는 말보다 느리지만, 그래서 진심이 닿을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이름이 공기 중에 떠올랐다. 윤하 그 이름 하나로,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도윤의 하루는 달라졌다. 배달지도, 거리의 소리, 우편함의 위치까지 모두 그녀의 이름을 따라 재배열되었다. 그의 일상은 여전히 단조로웠지만, 마음속은 늘 한 문장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찾는 일.’ 그것이 이제 그의 하루이자, 삶의 방향이 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편지를 들고 세상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너의 이름을 찾을 수 있기를.” 창밖으로 봄비가 내렸다. 편지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마치 잉크처럼 번져 들었다. 그는 그 번짐 속에서,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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