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언젠가, 그 편지 또한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
우체국의 오후는 언제나 느리게 익었다. 유리창에 매달린 햇빛이 조금씩 각도를 바꿀 때마다, 진열대 위 우표 케이스는 다른 색으로 숨을 쉬었다. 분류대에는 아침부터 모인 봉투들의 체온이 아직 식지 않았고, 잉크 냄새는 낮게 깔린 음악처럼 공기 속을 돌아다녔다. 도윤은 배달가방을 벽에 걸어두고, 반송함 옆의 낡은 의자에 잠시 등을 붙였다. 그의 귀에는 종종걸음으로 드나드는 발자국, 번호표를 뽑는 찰칵 소리, 창구 유리를 스치는 손바닥의 미세한 마찰음이 한 겹 한 겹 쌓여 들려왔다.
며칠 전부터 게시판에는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잊지 못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한 주’. 어쩌면 우체국의 오래된 시간표를 바꾸진 못하겠지만, 그 문장 하나가 사람들의 걸음에 아주 얕은 곡선을 만들었다. 택배 상자 대신 얇은 봉투를 들고 들어오는 이들이 늘었고, ‘언제 도착하나요’라는 대신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요’라는 질문이 창구 위로 내려앉았다.
그날, 먼저 들어온 사람은 흰 셔츠 소매를 반듯하게 접어 올린 노인이었다. 한 손에는 얇은 안경, 다른 손에는 오래 쓰던 만년필. 노인은 창구 앞 원목 탁자에 앉아 빈 종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종이 위에 먼저 자리를 깔아주어야 한다는 듯, 펜촉이 천천히 종이 가장자리를 쓸었다.
“하늘에 있는 사람에게도 우표를 붙여야 하나요?”
노인이 웃는 얼굴로 묻자, 도윤의 가슴 어딘가가 작은 파문처럼 흔들렸다.
“붙이셔도, 안 붙이셔도요. 그분이 보실 방법을 세상이 늘 마련해주더라고요.”
그의 대답은 설명이라기보다 축복처럼 흘러나왔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첫 줄을 썼다. ‘여보, 오늘도 밥상에 숟가락을 두 개 놓았어. 한 개를 치우려다, 다시 올려놓았어.’ 글씨는 둥글었고, 모음의 끝마다 미세한 떨림이 남았다. ‘현관문 앞 슬리퍼는 아직 당신 걸음 모양이야.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당신의 체온을 더듬게 돼.’
도윤은 그 문장들을 훔쳐 읽지 않으려 애썼지만, 잉크가 마르는 소리와 함께 문장들이 공기 속에 조용히 섞여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떠난 사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동작 속으로 자리를 바꿔 들어오는 것이라고. 숟가락, 슬리퍼, 문손잡이 사소한 사물들이 우편번호가 되어 어느 날 문득 마음에 도착한다고.노인이 봉투를 접어 건넸다.
“이건 반송되어도 괜찮소. 나한텐 돌아와도, 그이한텐 가도, 둘 다 그럴듯하니까.”
노인의 미소는 잔잔했고, 손등의 혈관은 기도의 줄처럼 선명했다. 도윤은 봉투를 받으며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도 누군가에게 걸어두고 싶던 인사가 있었다. ‘잘 받았어요.’ 그 단 한 줄.
다음 날 오후, 교복 치맛단에 먼지가 살짝 묻은 소녀가 우체국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왔다. 두 손으로 분홍색 봉투를 꼭 쥔 채, 수조 속 물고기처럼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주소를… 몰라요. 그래도 보낼 수 있을까요?”
봉투 앞면에는 어눌한 손글씨로 ‘하늘의 할머니’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이라는 단어의 ‘늘’이 두 번 겹쳐 쓰여, 그곳이 도착지이자 발신지인 듯 보였다.
도윤은 창구 안쪽의 작은 서랍에서 흰 메모지를 꺼내 소녀에게 밀어주었다.
“여기에 먼저 쓰고, 괜찮으면 옮겨 적어보자.”
소녀는 숨을 고르고, 펜 끝을 댔다. ‘할머니, 저는 이제 아침밥을 잘 먹어요. 도시락도 스스로 싸요. 달걀말이는 아직 짜요. 그래도 할머니가 늘 하던 쪽지를 쓰고 있어요. ‘밥 다 먹었지?’라고요. 저한테도 물어보려고요. ‘마음 다 먹었지?’’ 그 마지막 문장을 소녀가 쓸 때, 손등이 아주 살짝 떨렸다.
“할머니가 말했어요. ‘울어도 밥은 먹자’고. 그래서… 울면서 먹어요.”
소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세상에 보내야 할 눈물이 아직 한참 남았다는 듯이.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타고 흐른 물의 선이 글씨처럼 내려와, 거리의 모서리를 잠시 지웠다. 소녀의 봉투 위에 작은 물방울이 맺히자, ‘하늘’의 획이 조금 번졌다.
“괜찮아요.” 도윤이 말했다. “편지는 원래 조금 번져서 도착해요. 마른 마음으로 쓰면, 길을 못 찾거든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우체통에 넣었다. 봉투가 입구에 닿는 순간, 소녀의 어깨에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 무게가 내려가는 소리—그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누구나 안다. 내려놓는다는 건 가벼워진다는 뜻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 주 내내, 우체국은 다양한 음색의 손글씨로 가득 찼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에게 ‘어제의 우리’를 들려주는 아들, 말없이 떠난 친구에게 ‘그래도 괜찮았냐’고 묻는 젊은 남자, 서랍 속에서 우연히 찾은 실패한 반지의 주인에게 ‘너도 나처럼 잘 살고 있니’라고 묻는 편지. 어떤 봉투는 무척 두꺼웠고, 어떤 봉투는 거의 빈 것처럼 가벼웠다. 무게는 내용과 비례하지 않았다. 때때로, 한 줄이 한 생을 족히 채웠다.
저녁 무렵, 한 중년 여인이 창구로 와서 조용히 봉투를 내밀었다. ‘받는 사람: 엄마.’ 발신인의 이름은 비어 있었지만, 봉투의 모서리마다 자꾸 접었다 펴서 생긴 부드러운 주름이 있었다.
“보내실 주소는…”
“엄마가 이사를 자주 다니셔서요.” 여인이 웃었다. “괜찮아요. 이 편지는 도착하려고 쓴 게 아니에요.”
여인은 자리를 옮겨, 고객용 탁자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그가 퇴근 정리를 시작할 때쯤, 여인은 일어나 도윤에게 말했다.
“편지는… 그리움이 멈추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 같아요. 잠깐이라도요.”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도윤은 대답 대신 봉투를 받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밤이 내려앉은 우체국은 낮보다 소리를 더 또렷이 들려주었다. 정리되지 않은 끄트머리들—스탬프의 눌린 가장자리, 볼펜의 잔열, 봉투 사이에 낀 작은 먼지가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도윤은 창고 불을 반쯤 끄고, 배달가방에 내일자 구역표를 꽂았다. 그의 머릿속 배달지도는 어느새 사람들의 사연으로 덮여 있었다. 주소의 숫자들이 이름의 획으로 보였고, 골목의 굴곡이 각자의 하루로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봄밤의 공기가 길게 들어왔다. 전깃줄 위 박새가 짧게 울고, 맞은편 건물의 커튼 틈에서 노란 등이 점으로 새어 나왔다. 책상 위에 노트를 펼치고 펜을 쥐었다. ‘윤하에게.’ 그는 첫 줄을 쓰고 한참을 멈췄다. 노인, 소녀, 여인의 목소리가 그날의 빛과 함께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오늘 우체국엔 세 가지 그리움이 다녀갔어. 하나는 오래 머무는 그리움, 하나는 이제 막 머무르기 시작한 그리움, 그리고 하나는 머물 곳을 스스로 찾아가는 그리움. 나는 알게 되었어. 편지는 그리움이 쉬어 가는 벤치 같다는 걸. 거기 앉아 잠깐 숨을 고른 마음이, 다시 걸어갈 길을 찾아내더라.’
그는 문장을 더했다. ‘네가 말했지. 편지는 말보다 느리다고. 그래서 오늘, 느린 것들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 보았어. 느리게 쓰인 글씨가 더 멀리 가더라. 빨리 달린 말은 금방 지치고, 빨리 보낸 문장은 곧 잊히는데, 느린 편지는 그 자체로 길이 되더라.’
펜끝이 멎자, 창밖에서 바람이 작은 소리로 잡초를 스쳤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먼 곳의 비 냄새가, 아직 내리지 않은 비를 데리고 왔다. 책상 위 봉투 하나가 기척하듯 살짝 들렸다 놓였다. 그 안에는 그가 여태 쓰다 지우다 쓰지 못한 문장들이 고요히 눕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의도적으로 배달 동선을 바꿨다. ‘카페 윤하’가 있던 골목과 그렇게 멀지 않은, 재개발 구역 가장자리. 새로 세운 철제 펜스 너머, 허공을 배경 삼아 우편함 하나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닦아낸 것처럼, 구리 손잡이가 얕게 빛났다. 그는 손바닥으로 우편함의 뚜껑을 살짝 쓸었다. 차갑고 단단한 촉감, 그러나 오래 만져 온 것처럼 익숙했다.
우편함 안에는 엽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뒷면에는 짧은 글. ‘도윤 씨, 그곳엔 아직 바람이 머무나요. 나는 여기서 바람의 반대편을 배우고 있어요.’ 글씨는 그가 아는 리듬을 닮아 있었다. 둥근 자음, 길게 남기는 마지막 획, 멈추기 직전의 호흡. 그는 엽서를 접으려다 멈추고, 조심스레 제자리에 넣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어떤 편지는 보내지 않아도, 오고 가는 법을 스스로 안다는 것을. 머무는 자리와 떠날 자리를 시간이 가르친다는 것을.
그날 저녁, 우체국에는 느린 축제가 열렸다. 노인은 다시 와서 우표를 구입했고, 소녀는 새로 배운 달걀말이를 자랑하는 편지를 썼다. 여인은 발신인 칸에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적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언제 도착하나요’ 대신, ‘어디쯤 머물다 갈까요.’
도윤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미소 지었다. ‘그래요. 편지는 결국, 그리움이 멈추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죠.’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 말은 오늘만 맞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어제와, 내일과, 아주 오랜 훗날에도 맞을 말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우체통은 가벼워지고, 우체국 내부는 더 따뜻해졌다. 보내진 것들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머물렀던 것들의 온기가 오래 남아서였다. 도윤은 불을 끄고 유리문에 잠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의 뒷모습 너머로, 쌓인 봉투들이 하나의 풍경처럼 보였다. 도달하지 못한 문장들과 이미 떠난 문장들이 같은 높이에서 눕고 있었다.
문을 닫기 직전, 그는 작은 메모를 우체국 게시판 한가운데 붙였다. ‘잘 받았습니다.’ 단 세 글자.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는, 우체국이 세상에 보내는 회신.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그는 깨달았다. 편지를 배달하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 대신 답장을 적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의 그리움이 잠시 앉을 의자를 내어주고, 다시 일어설 때 등을 가볍게 떠밀어주는 일.
거리로 나서자, 봄밤의 공기가 이마를 식혔다. 가로등 불빛 아래 먼지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보이지 않는 글씨를 이루었다. 그 글씨는 아마도 그가 오늘 내내 마음속으로 읽어 온 한 문장일 것이다. ‘그리움은 멈추지 않고, 머문다.’
그는 그 문장을 따라 걸었다. 발끝에서 잔잔한 바람이 일었고, 먼 곳의 누군가는 방금 또 한 통의 편지를 끝맺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편지 또한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 도착하지 않아도, 충분히 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