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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주소

그의 가슴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by 클래식한게 좋아

초여름의 빛이 낮게 눌린 오후였다. 도윤은 오래된 지도 한 장을 반으로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고, 재개발 구역의 가장자리로 발을 들였다. 지도 위의 잉크 선은 물에 젖었다 말라 번져 있었고, 골목 이름들은 눌러 쓴 연필 자국처럼 희미했다. 그럼에도 그는 낡은 봉투에 적힌 그 한 줄, ‘서울 ○○구 ○○로 14길’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걸었다.


철제 펜스는 햇빛을 받아 얇게 번들거렸고, ‘출입 금지’ 표지판은 바람이 불 때마다 금속성의 마찰음을 흘렸다. 넘어진 가로등의 그림자는 길 한가운데를 비껴 누워 있었고, 철거를 기다리는 벽돌 더미 위로 잡초가 잔잔히 피어올랐다. 그는 발끝으로 자갈을 밀어내며, 한때 편지들이 이 길을 따라 그녀의 현관까지 닿던 시간을 떠올렸다. 우체통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그녀가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던 그 조용한 순간들. 주소는 사라졌지만, 그의 발걸음에는 여전히 길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녹슨 금속의 색이 햇빛을 받아 갑자기 붉게 깜박였다. 무너진 벽돌 더미 옆, 오래된 사진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우체통 하나가 서 있었다. 빨강은 거의 다 벗겨져 갈색에 가까웠고, 입구는 반쯤 찌그러져 제 입을 열지 못했다. 받침대는 기울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우체통이었다. 오랜 기다림의 자세로, 시간의 끝에 남겨진 단 하나의 증인처럼.


도윤은 우체통 앞에 멈춰 섰다. 손바닥으로 금속 표면을 쓰다듬자, 벗겨진 페인트 조각이 가볍게 흩어졌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움이 오히려 오래된 체온처럼 느껴졌다. 그때, 바람이 스쳤다. 금속 틈 사이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아주 작게 떨렸다. 그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손을 넣었다. 먼지가 부옇게 올라왔다 흩어졌고, 안쪽 깊은 곳에서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있었다.


낡은 봉투 한 장. 종이는 햇빛에 바래 크림색이 아닌 미세한 홍차빛을 띠고 있었다. 모서리는 가볍게 닳아 둥글었고, 봉합선 옆에는 오래전 빗물 자국이 꽃잎처럼 말라 있었다. 그는 봉투 앞면을 들여다보았다. 둥근 자음, 눌러 쓴 모음, 마지막 획이 살짝 길게 미끄러지는 습관. 보내는 사람: 윤하.

시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던 소리가 잠깐 멎고, 골목 끝의 먼지가 빛 속에서 펄처럼 떠올랐다. 그는 봉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종이가 체온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 온도가 살아 있는 것처럼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왼쪽 위, 작게 적힌 글씨. ‘도윤에게—’ 단 세 글자. 그러나 그 안에는 그들의 계절이 고스란히 접혀 있었다.


그는 숨을 길게 마시고, 봉합선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편지지는 연한 분홍빛이었다. 코팅되지 않은 종이의 섬유가 빛 속에서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필압이 지나간 자리에 얇은 그늘이 남았다. 그가 첫 줄을 읽었다.

도윤,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 때, 나는 아마 다른 계절 어딘가에 있을 거야. 우리는 늘 늦게 도착했지. 그래서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고, 나는 천천히 믿어보려고 해. 어느 날 주소가 사라지면 사람도 사라질까, 나 혼자 오래 생각해봤어. 그런데 우체국 창가의 빛을 보다가 알았어. 사람에게도 주소가 있다면, 그건 종이에 쓰는 게 아니라 마음이 기억하는 거더라. 봄이 오면 벚꽃잎 사이로 네 이름을 볼 거야. 여름엔 그늘이 조금 더 길어져 네가 앉을 자리를 만들겠지. 가을엔 우체통의 색이 더 진해지고, 겨울엔 편지지의 섬유가 더 선명해질 거야. 나는 그중 하나의 계절로 남아 있을게. 바람일 수도, 편지의 여백일 수도. 닿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는 늘, 편지의 중간쯤에서 만났으니까.


문장마다 그녀의 숨이 얹혀 있었다. 카페 창가에서 머뭇거리던 호흡, 마지막 어미를 닫던 손끝의 기척. 그는 편지를 다 읽고도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손바닥 위에서 종이가 아주 가볍게 떨렸다.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가 이 종이의 끝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골목을 가르는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기울어진 우체통의 녹슨 윤곽이 노을빛을 받아 잠깐, 아주 오래된 심장처럼 붉게 뛰었다.


그는 무너진 담벼락 곁에 쪼그려 앉아 우체통 옆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녹슨 틈 사이로 희미한 음각이 드러났다. ‘이곳은 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 누군가 장난처럼 새겨놓은 문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오직 그들을 위해 남겨둔 표식 같았다.


그는 편지지를 접었다. 모서리를 맞추고, 종이의 숨을 다치지 않게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눌렀다. 그리고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맥박을 넣듯이.

멀리서 포크레인이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통제선 너머, 새로 세울 빌딩의 조감도가 펄럭였다. ‘이 구역은 곧 새로운 거리로 바뀝니다.’ 문장은 분명했지만, 그에게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이상하게도 부드럽게 들렸다. 모든 사라짐은, 어딘가로 이어지는 진입로였으니까.


해가 내려앉자 그는 발뒤꿈치를 돌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뒤돌아보면, 우체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비스듬히 서서, 오랜 기다림의 각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겼다. 신발 밑창이 가루난 벽돌을 밟을 때마다 얕은 소리가 낮게 울렸다. 마치 오래된 타자기의 리턴 키가 멀리서 눌리는 소리처럼.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방에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노트를 꺼내 첫 페이지를 펼쳤다. 윤하에게. 오늘, 네 편지를 받았어. 세상이 다 지워져도, 너의 글씨 하나면 다시 길을 찾을 수 있겠구나. 사람의 마음에도 주소가 있다는 걸 알았어. 우체국 도장이 찍히지 않아도, 반송되지 않는 길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아마 또 늦게 도착하겠지. 하지만 괜찮아. 우리가 늘 그랬듯, 편지의 중간쯤에서 다시 만나자.


그는 펜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커튼을 밀고 들어와 책상 모서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주머니 속 편지가 아주 작게, 그 바람에 맞춰 숨을 쉬었다. 그는 알았다. 잊힌 주소는 사라진 길이 아니라, 뒤늦게 밝혀지는 길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이 지금 막, 그의 가슴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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