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마음이 닿는 길 위에서 존재한다
봄비가 그친 아침,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반송함의 금속 손잡이를 얇게 데웠다. 우체국 창고 안 공기는 오래된 음악처럼 낮고 차분했으며, 종이 냄새와 스탬프 잉크의 냄새가 겹겹이 쌓여 천천히 퍼졌다. 도윤은 붉은 도장이 찍힌 봉투들을 분류대 위로 조심스레 옮겼다.
‘수취인 불명’, ‘이사로 인한 반송’, ‘주소 없음’ 세 줄의 문장이 서로 다른 음색으로 그의 가슴을 스쳤다. 첫 번째 봉투는 모서리가 살짝 우그러져 있었다. 종이 섬유가 비에 젖었다 말라, 손끝에 닿는 결이 거칠었다. 보내는 사람: ‘한도원’. 받는 사람: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소 한 줄은 시차가 뒤틀린 시간처럼 읽기 어려웠다.
그는 봉투를 빛에 비춰 보았다. 종이 너머로 흐릿하게 ‘미안하다’라는 단어가 두 번, 다르게 쓰여 있었다. 첫 번째 ‘미안하다’는 낮게 웅크려 있었고, 두 번째 ‘미안하다’는 조금 더 곧게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작게 쉼표가 찍혀 있었다. 그 쉼표 하나가 몇 해의 계절을 건넜을지, 그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두 번째 봉투는 얇고 가벼웠다. 봉투 앞면, 기울어진 필체로 쓰인 이름 ‘정우’. 문장 마지막 획이 살짝 더디게 미끄러져 내려와, 종이 가장자리에 작은 머뭇거림을 남겼다.
발신인 이름은 없었다. 다만 우표 위에 작게 그려진 해바라기 도안, 그리고 뒷면 봉합선 위에 겹겹이 눌린 손자국. 그 손자국은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대신해 남은 것 같았다. 세 번째 봉투는 유난히 단단했다. 안에 굵은 종이가 들어 있는 듯했고, 봉투 입은 ‘테이프 재봉’이라도 한 듯 정갈했다. 받는 사람 칸에는 단 하나의 이름만 있었다.
주소도, 도시명도, 우편번호도 없었다. 그는 한동안 그 빈칸을 바라보았다. 닿을 수 없는 이름이란, 결국 길이 없는 지도를 품고 있는 셈이었다. 책상 위로 햇빛이 한 칸씩 옮겨 앉았다. 먼지 알갱이들이 금빛으로 떠다녔다. 도윤은 손끝으로 봉투의 골을 따라 천천히 문질렀다. 종이의 미세한 굴곡이 마치 심장의 맥박처럼 느껴졌다.
그는 반송함 깊숙이 손을 넣어 더 오래된 편지들을 꺼냈다. 상자 바닥은 젖은 기억처럼 차가웠고, 봉투의 색은 우유빛에서 홍차빛으로 변해 있었다. 제일 아래 깔린 봉투 하나를 들어 올리자, 종이 더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내는 사람: ‘은주’. 받는 사람: ‘아버지’. 봉투의 왼쪽 아래 모서리, 작은 물자국이 꽃잎처럼 말라 붙어 있었다.
그는 빛에 비춰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필압이 눌린 부분이 그림자처럼 드러났다 ‘다음 봄에는 꼭 함께 밥을 먹자’라는 문장 뒤로, 지워낸 듯 엷은 선이 남아 있었다. ‘다음’이라는 단어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문을 살짝 열어둔 말이었지만, 문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열려버린 듯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편지들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다. 도착하지 못했을 뿐, 사라지지도 않은 마음의 궤적들이다. 돌아온 편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오래 남는 사랑의 모양일지도 모른다. 창고 문틈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편지 한 장이 살짝 들려, 봉투 가장자리가 햇빛을 훔쳤다 놓았다. 그 반짝임이 순간 그의 눈을 찔렀다.
그는 그 작은 빛에 눈을 잠깐 감았다가, 문득 윤하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한 번도 쓰지 못한 첫 문장. 그의 마음 속 반송함에는, 주소조차 적히지 않은 봉투가 한 통, 오래전부터 누워 있었다. 그는 의자 등을 곧게 세우고,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볼펜 잉크가 종이를 스칠 때, 얇은 스침의 소리가 창고의 적막을 조심스레 뚫었다. ‘윤하에게.’ 단 세 글자, 그러나 가슴이 먼저 읽어 버린 이름 세 글자. 그는 그 다음을 쓰지 못하고 펜끝을 공중에 세웠다. 말이 생기기 전, 숨이 먼저 와 닿았다.
그 숨은 오래전 카페 창가에서 그녀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두던 호흡과 닮아 있었다. 그때, 창고 문이 달그락거리며 열렸다. 박 주임이 머그컵을 들고 들어왔다. “반송분 좀 많지? 봄마다 늘 그래.” 그는 사람이 떠나고 주소가 바뀌는 계절이 봄이라고, 꽃이 피는 동안 누군가는 떠난다고, 마치 오래된 조사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것도, 봄이니까요.” 그 말은 그 자신에게 더 가까웠다.
박 주임이 나가자, 적막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윤은 반송함에서 네 통의 편지를 골라 한 줄로 세웠다. 사과의 편지, 고백의 편지, 이름만 남은 편지, 그리고 수취인이 세상을 떠난 편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부서지는 빛처럼, 각기 다른 미완의 사랑이 단정히 나란히 놓였다. 그는 첫 번째 봉투의 뒷면을 펼쳐 보았다. 테이프 자국이 오래된 질감으로 반짝였다.
그는 종이의 무게를 가늠하듯 손바닥에 올려두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글씨를 더듬었다. ‘미안하다’는 단어가 두 번 쓰였던 바로 그 편지. 어쩌면 그 두 번 사이에는, 차마 쓰지 못한 울음 한 번이 들어 있을 것이다. 사과는 때로 도착보다 늦게 자란다.
늦게 자란 사과는 더 단단하지만, 쉽사리 베어 물 수 없다. 다음 봉투. ‘받는 사람: 정우.’ 발신인 이름이 비어 있는 자리. 그 빈칸에는 수없이 지운 이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겹쳐져 있을 것이다. 그는 상상했다. 밤마다 몰래 써 보았다 지우고, 다시 써 보았다 지우는 손의 체온을. 광택 없는 종이가 손끝에서 조금씩 닳아 얇아지는 시간을. 닿지 못한 고백은, 종이의 가장자리부터 닳아 사라지는 법이다. 세 번째 봉투. 오직 이름만. ‘혜린.’ 그 한 단어가 편지의 모든 내용을 품은 듯, 단단하게 가운데 박혀 있었다. 주소가 없는 편지는 영영 길을 묻는다. 지도 없는 이름은 결국 바람을 길잡이로 삼는다. 바람이 멈추면, 그 이름은 어디에 누울까. 그는 봉투를 가슴 가까이에 잠깐 가져다 댔다. 심장 박동이 종이의 결에 희미하게 옮겨 갔다. 이름 하나가 사람을 살리고, 어떤 이름은 사람을 천천히 녹여 없애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봉투. ‘아들에게.’ 도윤은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놓았다. 아무도 읽지 못할 편지야말로, 가장 간절한 편지일 때가 있다. 읽을 이가 없는 문장들은 종이 안에서 홀로 끝말잇기를 한다. 문장 끝의 마침표가 더 크게 보이는 까닭이다. 그는 네 통의 편지를 차례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각각의 종이에서 아주 다른 체온이 느껴졌다. 종이는 사람의 피부처럼 온도를 기억한다.그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믿게 되었다. 해가 져, 창고 바닥에 밤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형광등 불빛은 종이 위에 하얀 물결을 만들었다 지웠다. 우체국 밖 골목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자전거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점으로 흩어졌다. 도윤은 결국 의자에서 일어나, 배달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가방 속에는 내일 갈 주소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 위로 자신의 메모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윤하 카페…’ 점( … )이 세 개. 그 점들은 미완의 기다림처럼 가볍게 떨렸다. 그는 펜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봉투가 아니라, 작은 노트의 첫 페이지였다. 글씨는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깊었다. 윤하에게. 오늘 반송함에서 네 사람의 마음을 보았어. 둘은 사과였고, 하나는 고백이었고, 하나는 이름이었다. 너에게 쓰지 못한 내 마음도 그 사이 어디쯤 서 있었지. 도착하지 못한 마음이 실패가 아니라는 걸, 오늘 처음으로 믿어보려 해. 돌아온 편지는 돌아온 만큼 오래 남는다는 것을, 반짝이는 먼지 속에서 알 것만 같았어. 그는 문장을 잠깐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어둠이 골목 모서리를 둥글게 감싸고, 가로등 불빛이 종이 위로 조용히 번졌다. 빛은 잉크 마른 자리부터 천천히 노랗게 데웠다. 편지는 결국, 사람의 시간이라고 너는 말했지. 나는 오늘 알았어. 읽히지 않아도, 도착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이 한 번 머물렀던 종이는 그 자체로 길이라는 것을. 그러니 나는 계속 쓸게. 네가 없던 계절에도, 네가 있을 계절에도. 이름을 잃어버린 편지처럼 방황하더라도, 결국 너에게 가는 바람의 방향을 배울 때까지. 그는 펜을 덮고 노트를 닫았다. 속지 사이에서 종이가 작은 바람을 냈다.
그 바람이 볼을 스치자, 그는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한 문장을 조용히 따라 말했다. “편지는 도착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마음이 닿는 길 위에서 존재한다.” 반송함의 금속 손잡이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 빛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그는 배달가방을 들어 올리며, 가방 속 어딘가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함께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우체국 현관을 나서자, 늦봄의 공기가 얼굴에 얇게 닿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음속에서 한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윤하 소리가 되기 전의 숨처럼, 빛이 되기 전의 온기처럼, 그 이름은 금방이라도 편지가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걸었다. 돌아온 편지들이 뒤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종이의 박동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의 맥박처럼 느려졌다. 밤은 깊어졌고, 도윤의 그림자는 우체국 벽을 지나 골목의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졌다. 그 길 끝에서, 언젠가 또 다른 반송함을 열게 되더라도 그는 알았다. 거기엔 늘, 자신의 마음이 먼저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