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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Dec 10. 2023

용의 꼬리 vs 뱀의 머리

첫 번째 편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선택지는 없나요? 

안녕 다지야, 너에게 처음 편지를 보내려니 굉장히 떨린다. 편지를 쓰기로 결심을 하기까지도 참 오래 걸렸는데 막상 시작을 하려니 역시 쉽지가 않네. 내가 담는 말들과 내가 겪었던 경험들이 오히려 너의 길을 좁히는 것일까 봐 일주일 동안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라. 그래도 용기를 내어 써보려 해. 이 편지를 모두 읽은 후 너의 선택이 어떻든 나는 너를 항상 자랑스럽게 여길거고, 언제나 응원할 거니까. 그나저나 그 시절의 나는 샤이니를 좋아했던 것 같네 (지금도 멋있지만 말이야). 사진은 귀엽게 봐줘. 


얼마 전 수능이 끝났으니 아직 19살이 되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는 고3 수험생으로 생각하고 있겠네! 걱정이 많을 너에게 우선 2년간 너무 잘해왔다고 칭찬을 해주고 싶어. 너는 칭찬을 먹고사는 아이니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멋진 추억을 쌓기에도 부족할 나이에 아침부터 새벽까지 쉴 새 없이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어. 이제 딱 일 년만 지나면 이 지긋지긋한 수험 생활도 끝이다! 근데 말이야. 네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그리고 왜 내게 오래전 말했던 학과에 지원하지 않기로 했는지도. 너의 마음이 바뀐 것이길 바라며 우선 나의 이야기를 해줄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직전,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문과 이과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었어. 좋아하는 과목이 너무나도 많았던 호기심 대마왕인 나에게는 그 선택이 마치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아?'라는 질문처럼 정말 어려웠어. 지금은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며 브랜드 전략을 짜고,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나를 대학 친구들부터 회사 동료까지 2000% 문과형 인간이라고 확신하지만, 사실 나는 화학, 생명과학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었거든. 


문과, 이과 중에 동그라미만 치고 서명만 하면 되었던 그 서류에 나는 처음에는 정말 쉽게 이과에 동그라미를 쳤었어. 지금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인 것을 알지만 잘 모르던 그 시기에는 돈 없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약을 만들고 싶었어. 얼마 뒤, 모든 반 친구들이 서류를 제출하고 담임 선생님과의 1:1 진로 상담을 하는 날이 되었어. 호기롭게 열고 들어간 교무실에서 나는 얼마나 얼어있었는지 몰라. 준비성이 정말 철저하셨던 나의 담임 선생님은 내가 옆에 놓여 있던 작은 의자에 앉자마자 일 년간의 나의 성적을 하나하나 보시며 조언을 해 주셨거든. 나의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 성적표가 필요할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는데 말이야. 


사실 조언이라기보다는 설득에 가까웠지. 이과에 진학하고자 했던 나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화학과 생명은 400명의 친구들 중 2등급을 받았지만 수학은 5등급이 찍혀있었고, 그와 반대로 국어, 영어, 지리, 역사 과목은 평균 1.5등급을 받았었지. 특히 언어를 깨우치기 시작한 이래로 대하 사극이란 사극은 역사책을 옆에 두고 다 찾아본 덕분에 4번 시험 연속 전교 1등을 했었어. (나의 수학성적에 대해 조금의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선행학습을 1도 하지 않고 고등학교에 왔는데, 여기 학교 애들은 이미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3학년 이과수학까지 끝내 놓은 애들이 꽤나 많더라. 선생님들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그렇게 나의 암담한 성적표에 어깨는 축 늘어지고 점점 나에 대해 확신이 없어져 가던 차에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어. "잘 봤지? 이제 결정해 볼까? 용의 꼬리가 될래, 아니면 뱀의 머리가 될래?" 선생님은 나의 미래를 응원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야. 그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2분 정도였고, 결국 나는 성적표를 따라 문과를 선택하게 되었어. 그리고 대학에 진학을 할 때도 반 정도는 역시나 성적에 맞게 생각지도 않던 과를 지원을 하게 되었지. 방황을 거쳐 전과를 하기는 했지만. 


이 경험을 너에게 말해주는 이유는 선생님을 원망해서도 아니고, 지금 나의 삶을 후회해서도 아니야. 선생님에게는 내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걸 바라는 건 선생님으로서 당연한 거니까.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과가 문과보다 나은 선택지도 아니고. 


하지만, 네가 이미 결정한 선택에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설령 그 선택이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라도 아예 해보지 않은 것만큼 슬픈 건 없으니까. 내가 이과로 진학했으면 선생님의 말대로 멀리 서는 보이지도 않은 용의 머리 저 밑 부분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지 않았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야. 


과가 정해진 후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가는 겨울 방학 때는 아예 듣는 수업도 달라졌어. 그때까지 나는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던 것 같아. 일주일에 몇 번은 이과 수업을 몰래 엿들었으니까. 결국 방학이 끝날 무렵 이를 담당하는 선생님께 가서 이과로의 변경을 요청했는데 이미 늦었다더라. 아쉬움에 교무실이 떠나가라 펑펑 우는 나에게 선생님은 과를 변경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과를 신청했는데 문과로 오고 싶어 하는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 무슨 포로 교환도 아니고 21세기에 이렇게 한 사람의 진로를 정하나 싶었지. 그래도 방법이 그거 하나라잖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일. 근데 3일 동안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나와 바꿔줄 사람이 없더라. 이게 내 운명인가 보다 이렇게 중간에 한 번 더 포기를 한 것까지 총 3번을 포기했어.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는데 그땐 내가 문제처럼 느껴졌어. 참 이상하지? 


그런 시간들이 지나 어찌어찌 인생은 흘러가고, 최선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결정을 하는 순간순간마다 그때의 나약했던 나를 떠올리곤 해. 그리고 이게 정말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한번 더 생각하며 선택을 하게 되지. 


그러니 다지야 너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그 결정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마. 그 결정은 아주 잠시지만 그때의 아쉬움과 후회는 아주 오래오래 남더라고. 용의 꼬리가 될지 뱀의 머리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지, 그 길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너 자신인 걸 꼭 기억해 줘. 


이 편지를 통해 너의 선택과 행동에 믿음을 가지길 바라며,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 

다음 주에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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