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아빠는 출장을 가서 집을 비웠고, 네 살이던 아들도 시댁에 맡기고 집에는 나 혼자였다.저녁 7시부터 배가 살살 아파오기에 금방 진통인 걸 알아차렸다.
'하필이면 아무도 없을 때…….'
큰애를 낳을 때 5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기를 기다려 병원에 갔었다. 아직 이 정도 진통이면 멀었다.
병원까진 걸어서 15분. 지금 병원에 가봐야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기밖에 더하나.
첫애 낳은 경험을 되새겨 느긋하게 5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 11시가 되자 가만히 누워 있을 통증이 아니었다. 진통이 올 때마다 생살을 칼로 도려내는 듯했다.
'으으, 너무 아픈데.지금이라도 구급차를 불러?'
절로 전화기에 눈이 갔다.
'애 처음 낳아 보나. 호들갑스럽게 무슨.'
친정이 있던 서울에서 첫애를 낳을 때는 눈도 못 뜰만큼 아팠다. 하도 아파하니까 간호사가 오더니 시니컬하게 그랬다.
"산모님, 이 정도도 못 참아서 애를 어떻게 낳으려고 그러세요."
순간, 친구 언니가 애 낳다가 젊은 간호사의 말에 화가 나서 발로 걷어차며 "니가 낳아봐라!"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무지막지한 진통을 겪느라 간호사에게 한마디 쏘아붙일 힘도 없었다. 하늘이 노래져야 애가 나온다더니 처음 겪는 격통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뼈마디가 산산조각 날 것처럼 아픈데 나중에는 무통 주사를 놔달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무통 주사가 드물고 자연 분만을 당연시했던 시대라 산고 또한 엄마가 겪는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입안에서만 뱅뱅 돌던 '무통 주사 놔주세요'는 끝내 당연한 산고와 맞바꿨고, 혹독한 엄마 되기를 자처한 나는 첫아들을 낳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처음이었으니 몰라서 그랬다 치자. 두 번째는 다르겠지.
밤새 진통으로 잠 한숨 못 자고 가만히 누워 있지도 못한 채 끙끙거리다 보니 어느덧 새벽 5시.
살던 곳은 겨울에 눈 보기가 흔치 않던 부산이었다. 때는 1월 초. 그저께 내린 눈이 꽤 쌓여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미련하게도 병원이 멀지 않다는 것만 생각하고,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두른 채 용감하게 집을 나섰다.
모두 잠이 들어 고요한 새벽.
아파트를 나서자 매서운 공기가 확 달려든다. 아직 어둠은 짙었고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거리를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걸음 떼지 않아 진통이 또 시작됐다.
"으윽……!"
너무 아파서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진통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때부터 두세 걸음 가서 멈추고, 다시 두세 걸음 가서 멈추고.이 새벽에 연락할 사람도 없고 두 뺨은 날카로운 한기에 살점이 떨어져 나갈 지경인데 배는 아파 죽겠고.다시 아파트로 돌아가려니 엄두가 안 나고. 119에 연락하고 싶어도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난감했다.
'병원까지 갈 수 있어. 조금만 힘내.'
혼자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떼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 트럭 앞에 남자 한 분이 서 있다. 방금 차에서 내린 건지, 타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아무도 없는 새벽 거리를 웬 여자가 걷다가 서다가 하고 있으니 뭔 일인가 싶어 지켜보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도와달라고 할까?'
갈등이 된 나도 그분을 빤히 보고 서 있었다. 집을 나선 지 15분이 넘었지만 아직 반도 못 간 상태였다.
'아니야. 나 혼자 할 수 있어.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할 거였음 진작 했어야지.'
쓸데없이 오기가 발동한 나는 도움 구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분도 내가 괜찮아 보였는지 아파트로 들어가 버렸다.
하얗게 눈이 쌓인 길거리엔 다시 나 혼자 남았다. 병원까진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이 길이 이렇게 멀었나? 백만 년은 걸릴 것 같은 그 길을 걷다 서다 반복하며 '잘하고 있어'만 계속 되뇌었다.
'후아 후아! 조금만 참자, 아가야. 오늘 우리 만나는 날이야.'
착상 후 감기약을 먹은 탓에 병원에서 낳지 말라던 아이. 장애아라도 좋으니 낳기로 결심한 뒤 따로 검사도 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이때만 해도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 딸이면 낙태시키는 일이 많았다. 성별을 알려주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8개월쯤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이제 슬슬 아기용품준비해야 하는데 뭐로 사요?"
"아기 손가락 보이세요? 너무가늘고 예쁘죠? 머리도 작고 손발도 작아요."
태몽에 눈부신 백마와 검은 소와 황금을 보았다. 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나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큰애가 아들이었기에 딸을 낳고 싶었다.
처음 우려와 달리 아기는 건강하게 잘 자랐지만, 나 홀로 아기를 낳으러 가는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3분의 2 지점부터는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멀리 병원이 보였고, 진통도 점점 심해졌다.
큰애 때는 5분 간격으로 갔어도 한참을 더 있다가 낳았기에 엄청 고생했다.
'지금 가면 금방 낳을 수 있을 테니 차라리 잘됐지 뭐.'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다. 로비의 시곗바늘이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그마치 1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배가 너무 아파 추위도 잊을 지경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차분하게 접수를 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핑크색 가운으로 갈아입고 칸막이가 쳐진 대기실 침대에 눕자 살았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해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대견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오더니 산도가 얼마나 열렸는지 확인했다.
"산모님, 지금 오시면 어떡해요?"
간호사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나무랐다.
"네? 왜요?"
깜짝 놀라 묻자 간호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산도 다 열렸잖아요. 길에서 애 낳을 뻔했어요."
"헉! 첫애 때도 5분 간격일 때 병원에 갔는데……."
"첫애 때는 산도가 늦게 열리지만 둘째는 안 그래요. 큰일 날 뻔하셨네요.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보호자는요?"
"혼자 걸어서……."
"이 새벽에요?"
간호사는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용감한 게 아니라 무식한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하긴, 나 같은 미련퉁이가 어디 있담. 구급차도 부르지 않고 눈길을 혼자 걸어왔으니, 오는 도중 미끄러지거나 양수라도 터졌음 어쩔 뻔했을까.
슬기롭지 못한 엄마 때문에 아기만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했다.
진통은 또다시 시작되었고, 커튼 너머로 다른 산모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산모들의 신음소리에 더욱 미칠 것 같았다.
"산모님, 많이 아프시면 옆으로 누워 계세요."
아까 나를 나무라던 간호사가 와서 끙끙 앓는 내게 말했다. 하지만 옆으로 누워봐도 소용없었다.
'빨리 낳아버렸으면!'
산도가 다 열렸다면서 아기는 왜 안 나오는 걸까?
나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첫애 때처럼 내 손을 잡아줄 친정엄마나 이모도 없었다. 사지가 뒤틀리는 통증에 그제야 혼자서 아기를 낳는다는 게 두렵고 서러워졌다.
나는 혼자 왜 이러고 있나?
아기는 괜찮을까? 괜히 걸어와서 잘못되는 건 아닐까?
머릿속에서 불길한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씩씩하게 걸어왔던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엄습하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산모님, 변기에 앉아 보시겠어요? 앉아서 힘주면 좀 더 빨리 나올 수도 있어요."
"변기요?"
배도 아프고 불안해 죽겠는데 간호사까지 나한테 왜 이러나?
어이없어진 나는 간호사가 날 놀리나 싶었다.
"힘주는데 쓰는 변기예요. 더럽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아기가 나올 것 같으면 나오세요. 마냥 힘주면 길바닥 말고 변기에다 애 낳을 수도 있어요."
간호사가 농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하며 겁을 주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간호사가 알려주는 방으로 갔더니 정말 변기가 있는 게 아닌가!
세상에나!
병원에 해산용 변기가 갖춰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서 낳고 싶은 마음에 변기에 앉아 정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제발, 제발! 이제 그만 좀 나와~!!!'
요즘 변비 광고에서나 나오는 장면보다 백 배는 실감 났을 거다. 누워서 힘을 줄 때보단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아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른 밖으로 나왔다.
"아기 나올 것 같아요."
"침대에 누워 보세요."
침대에 누웠더니 간호사가 상태를 보며 말했다.
"분만실로 가시면 됩니다."
변기에 앉아 힘을 준 덕분에 분만실로 들어간 지 30분 만에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아기가 울지 않는다.
'왜 안 울지?'
가뜩이나 불안하던 차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때.
철썩! 아기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애응애~"
딸인 게 분명한 가느다란 울음소리.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진이 빠진 와중에 간호사에게 제일 먼저 했던 질문은.
"손가락, 발가락 다 있어요?"
"네. 다 있습니다. 건강한 딸이에요. 얼굴 보세요."
시력이 나쁜 데다 금방 해산하여 기진맥진한 나는 아기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건강한 딸이란 말에 안심이 되었다. 표현은 안 했어도 열 달 내내 아기가 정말 장애아면 어쩌나 내심으론 걱정하고 불안했다. 그때마다 태몽을 떠올렸다.
백마, 검은 소, 황금.
'이 아인 크게 될 인물이고 부자가 될 거야. 장애아라도 그런 인물이 되도록 잘 키우면 돼.'
밤새 진통을 겪고 1시간 동안 혼자 눈길을 걸어가2시간 반 만에 낳은 내 딸.
아홉 살 때 딸에게 물었다.
"넌 꿈이 뭐야?"
"호텔 사장."
역시 배포가 큰 아이였다.
딸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물었다.
"넌 그때 왜 호텔 사장이 되겠다고 했어?"
"킥킥. 호텔 사장 되면 요리를 마음대로 먹는 줄 알았어. 호텔 사장이 요리사인 줄 안 거지."
어릴 때부터 먹성 좋은 딸은 이제 20대 중반이 되어, 요리업계에서 하나씩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초등학교 때도 책가방을 내 손으로 챙겨준 적이 없을 정도로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하는 딸을 볼 때마다 뱃속에서부터 강한 생명력을 타고 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그때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면 어쩔 뻔했을까.
크면서도 말썽 한 번 없이 나의 위로가 되어준 딸을 볼 때면, 아찔하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