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 그날 밤

아내가 아닌 엄마로 살면 돼

by 날자 이조영

1997년 둘째가 태어나던 해.

애들 아빠의 사업이 망하면서 내 인생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봄에 사업차 러시아에 갔던 그는 3개월 걸린다는 예상과 달리 연말이 되도록 나오지 못했다. 그가 외국에 간 사이, 잠깐 서울 친정에 다녀올 계획이던 나 역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러시아에 발이 묶여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12월 31일. 그는 기적처럼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아파트는 이미 경매로 넘어갔고 집기에는 빨간딱지가 붙었다. 시댁에서 돈을 빌려다 썼는지 시댁 또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돈을 빌린 누군가에는 사기죄로 고소가 들어왔다.

애들 아빠가 뒤늦게 수습을 해본들 소용이 없었다.

사기죄는 간신히 넘겼으나,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생각지도 못한 친정살이를 시작했다.

내 나이 서른한 살. 직장생활도 오래 하지 못하고 결혼하여 아이 둘 낳은 게 전부였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무엇보다 인생이 지하 백층쯤 내려간 비참함이 나를 모질게 괴롭혔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실패.

인정할 수 없었다. 내 인생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시나리오였다.

친정에서는 우리 네 식구에게 안방까지 내주었지만, 나와 애들 아빠는 점점 골이 깊어졌다. 부잣집에 시집간다고 모두가 부러워하던 결혼생활도 그렇게 끝이 났다.

애들 아빠의 사업 실패에 이어 이혼까지. 가진 돈 한 푼 없이 친정에 얹혀살며 아이 둘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두려움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였다.




아이들을 엄마에게 맡기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경제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종종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뜨악해졌다. 사장님 사모님에서 애 둘 달린 이혼녀에 나이 많은 말단 직원으로의 전락은 정체성 혼란과 함께 자존감을 뭉개버렸다.

정신적 충격은 내 인격에도 영향을 미쳤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조그만 일에도 예민해졌다. 얼굴은 어둡고 곧잘 화를 냈으며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스스로 고립되어 누구에게도 편히 곁을 주지 않았다.


‘나는 비참하게 살 사람이 아니야.’


오로지 재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봐도 도무지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이렇게 살아야 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혀버린 인생.

나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처참해진 내 신세를 용납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딸의 이런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슬픔과 괴로움. 반대한 결혼을 해서 이 모양이 되었노라고, 나 자신을 수도 없이 자책했다.

직장도 적응하지 못했고 친정살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즈음,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지하 방을 얻었다. 엄마가 해준 돈으로 자그마한 가게도 시작했다.

그러나 장사에 소질이 없던 나는 그마저도 근근이 이어갔다. 천 원, 5천 원으로 일주일을 버티기도 하고, 전기와 가스가 끊길 위기도 여러 차례. 밥해먹을 쌀 한 톨 없어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 때도 있었다.

불안과 설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분노.

가난이 견딜 수 없었고, 이혼녀라는 게 수치스러웠다.

두 아이를 보면 웃다가도, 못나고 부족한 엄마인 나를 보면 분노가 치밀었다. 나 때문에 아빠 없는 아이들로 만들었다는 죄책감. 호수처럼 잔잔하던 감정은 어느 순간 태풍처럼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나는 죽어야 해.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나지. 어떤 방법이 좋을까. 애들이 학교 간 뒤 목을 맬까. 칼로 손목을 그을까. 약을 먹을까. 차에 뛰어들까.'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죽을 생각만 했다. 인생의 쓰디쓴 실패 후 불행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순간부터 나는 자살을 꿈꾸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가게에 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말도 없이 거리로 나왔다.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 것만 같기에 잠깐 걷다가 올 생각이었다.

한 시간도 넘게 길을 걷다 보니 낯선 동네였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앞이라곤 보이지 않는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삶의 냉기를 견딜힘이 내겐 없었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쌩쌩 달리는 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야!'


누군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래, 이제 고통은 끝났어.'


몸을 차도 쪽으로 돌렸다. 고통을 끝낼 기회였다. 멀리 덤프트럭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 차에 치이면 단번에 죽을 수 있겠구나.'


발 하나를 차도로 내리는 순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내 머리를 잡아 돌린 것처럼 고개가 반대로 휙 돌아갔다.


'무슨 일이지?'


한 발을 차도에 내린 채로 멍하게 서 있었다.

그 사이 덤프트럭은 쌩 지나쳐 갔고, 내 눈에 보이는 건 하얀 건물의 내과병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깜짝 놀라 차도에 내렸던 발을 인도로 올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오자 겁이 덜컥 났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 해.'


무작정 내과병원을 찾아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네, 그냥…… 아파요.”


간호사가 나를 빤히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진료실로 들여보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의사 선생님이 의자에 앉는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셨다. 그의 눈에도 내가 정상으로는 안 보였던 모양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생님, 제가요…….”


넋 빠진 얼굴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두서없이 쏟아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던 걸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에게 모조리 해버렸다.

의사 선생님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의 얼굴에 연민이 가득했다. 내 말을 귀 기울여주는 그의 진심이 느껴져 몇 번이나 울컥했다.

얘기를 마친 나는 크게 한숨을 토했다.


"후아! 이제 살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제 친구 중에 정신과 의사가 있어요. 소개해 드릴 테니 가보시겠어요?"


그가 명함 뒷면에 전화번호와 병원 이름을 써 주었다.




불면증의 밤.

큰방에 두 아이가 자는 동안, 나는 작은 방으로 건너와 벽에 우두커니 기대앉아 있었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아찔했다.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죽을 생각을 하다니. 두 아이의 생명을 낳은 엄마로서 정말 못할 짓이었다. 차도로 뛰어든 순간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날 구한 것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아이들을 어떻게 낳았는데. 미쳤지, 정말…….’


문득 침대 아래 두었던 상자 하나가 생각났다. 낡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자 애틋함이 밀려왔다.

두 아이의 탯줄과 아기수첩, 태어나자마자 입었던 배냇저고리.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혼하면서 두 아이만은 내가 키우겠다고 했다. 내 인생의 시나리오에서 아이들만큼은 끝까지 등장하는 인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런데 몇 년도 안 돼서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시나리오를 또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뻔했다.

두 아이를 낳을 때도 애들 아빠는 내 곁에 없었다. 심지어 둘째는 눈이 잔뜩 쌓인 새벽에 혼자 병원까지 한 시간을 걸어가서 낳았다. 임신한 걸 모르고 감기약을 먹어서 병원에서는 낳지 않기를 권했지만, 장애인이어도 상관없으니 낳겠다고 강단 있게 밀어붙였다. 4개월째 받는 장애인 검사도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때 난 꽤나 용감하고 씩씩한 엄마였다. 그러니 인생에서 남편 하나 없는 게 무슨 대수일까.


'아내가 아닌 엄마로 살면 돼.'


그 순간, 애들 아빠의 존재를 내 인생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는 비로소 혼란스러웠던 정체성을 찾고, 마구 뭉개지고 짓밟힌 자존감을 일으켜 세웠다.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기 낳는 것만 할까. 해산 뒤에 오는 기쁨은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도 잊게 만든다.

탯줄은 고통 속에 피는 꽃. 생명은 그래서 고귀하다.

그 탯줄이 나를 강인한 엄마로 만들었듯이, 나는 다시 한번 살아보기로 했다.

그날 밤, 아이들의 탯줄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나로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나를 완전히 사랑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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