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습관적 여행의 시작
첫 경험은 의미가 있다.
이 경험을 지속 이어가고 싶은지 한 번으로 끝내고 말지 판단을 해주는 척도와 같다.
이번 여행을 떠난다면 벌써 4번째 해외여행이 되겠지만 이전까지 몇 주 혹은 몇 달 이상의 장기여행은 경험해 본 바가 없었다. 길어야 일주일이었던 이전 여행에서는 주어진 시간 그리고 제한된 체력 안에 맛볼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내기 위해 철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늘 첫날 이튿날에는 대부분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다른 나라에 왔다는 이유 하나로 에너지가 몇 배로 뿜어져 나오니 계획한 모든 일정을 소화하였었다. 그러고 딱 며칠만 지나면, 아침부터 사소한 하나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모든 열들이 뒤틀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멘탈이 와르르 체력은 너덜너덜, 무거운 몸을 동반한다고 느끼는 순간 여행의 의미는 이미 퇴색되고 난 뒤였다. 때론 정신을 차려보면 현지 가이드 마냥 친구들을 바삐 챙기고 있는 내 모습에 현타까지 맛보게 되었다.
여행을 하러 온 것일까 노동을 하러 온 것일까
분명 자유로움과 해방을 즐기고 느끼기 위해 여행을 왔는데 계획된 틀 안에서 융통성 없이 쫓기는 기분이었다.
원래 여행이 이런 거야?
그리고 이게 진짜 로컬 여행 맞아..?
감칠맛 나는 여행의 끝자락에서 아쉬움의 입맛만 다시었던 기억과 보살핌을 필요로 했던 경험의 콜라보는 내 행동에 나만 책임지면 되는, 뻔한 루트와 일관된 계획 대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도 시간적 여유가 되는 여행의 결핍으로 진화하였다.
다음 여행은 어디가 되든 전재산을 탈탈 털어 장기 여행을 하고야 말테야.
현재 나는 가진 돈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학생이지만 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어디든 떠날 수 있는, 가진 게 시간뿐인 휴학생이다. 몇 달 동안 바짝 일하면 원하는 돈은 바로 모이니 이를 실현해 볼만한 최적기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나는 주저 없이 바로 스카이스캐너를 들어가 비행기 값을 탐색하였다.
내 손가락이 자연스레 향했던 곳은 한 달 여행의 성지인 유럽이었다. 지역특색이 강하지만 관광인프라는 잘 형성되어 있어 위험 리스크가 적고 나라 간 이동이 편리하여 초보 장기 여행자에게 이만큼 적합한 곳이 어디겠나 싶었다. 그리고 11월 여행을 앞두고 있으니, 한 달 즐기고 나면 크리스마스였다. 유럽의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고? 벌써 심장이 나대기 시작하였다.
헐 아시아나가 왕복 70만 원이네??
이 정도면 하늘이 제발 좀 가라고 신발까지 신겨주는 거 아닌가
이렇게 나름대로 갈만한 이유들로 넘쳐났지만 자연스레 유럽을 찾은 진짜 이유는 이보다 더 단순했다. 여행지 선택에 있어서 만큼은 본성에 충실한 나이기에 이번에도 역시 그저 마음이 따르는 대로 이끌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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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화가 무척이나 많았던 고등학생 때의 나는 마음속 활보하고 다니던 화라는 친구를 힙합 음악으로 다스렸다. 나 대신 미친 듯이 호통쳐주는 랩이 그렇게 속 시원했다. 힙합의 입문과 함께 자연스레 본토 음악에 관심 가지게 되었고, 그중 비트와 멜로디가 유난히 눈에 띄는 칸예 웨스트 노래를 줄곳 많이 들어왔다.
20살이 되니 모든 걱정 근심은 다 사라져 버렸다. 나를 그렇게 잔잔바리로 온몸을 아프게 한 고3병이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화가 안나다 보니 강렬한 비트와 함께 호통치는 랩이 시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모든 것을 다 재미로 느껴지게 만드는데 화날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자연스레 chill 한 느낌이 나는 힙합이나 페스티벌에서 흘러나올 것만 같은 장르의 음악을 더 많이 찾게 되었다.
딱 2년이 지나니 다시금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지금 학과 공부가 잘 맞긴 한 것 같은데 잘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고, 학교 공부만으로는 취업 혹은 적성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명색에 사망년이라 불리는 3학년답게 고뇌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신나는 노래를 들어도 썩 신나지 않고 그렇다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익숙한 노래들 중 조금은 잔잔한 음악들을 찾게 되었다. 듣던 노래들도 슬슬 질리기 시작할 때쯤, 칸예 웨스트의 신간 앨범이 나왔다.
Ghost town 트랙을 듣자마자 유럽의 시골 풍경을 떠올렸다. 유럽에 가본 적도 없는데 유럽에서의 경험을 회상하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지쳐있는 느낌보다는 어떠한 고민과 생각 없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만을 음미하며 자신만의 안정을 지키는 것 같았다. 그 상상이 잡다한 생각으로 무거워진 머리를 한결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때 언제가 됐던 상상 속의 유럽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서게 됐다.
이 앨범을 제작할 당시 칸예는 와이오밍에 있었다고 한다. 와이오밍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시골 주다. 그래서인가 강렬하고 센세이션한 비트로 전곡을 채워진 이전 앨범들과 달리 가사들과 멜로디 전반적으로 따뜻함과 가정적인 모습이 비쳐있다. 이전과 다른 곡 분위기에 많은 팬들은 아쉬움을 표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칸예의 마음 상태처럼 머리가 시끄러울 때마다 안정감을 주는 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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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 안정화의 실현과 만수르도 부럽지 않은 시간 부자였던 나는 여행 경비를 채우기 위해 3개월 동안 즙을 짜내면서 열심히 돈 모으는데 전념하였다. 그렇게 모인 돈은 작고 귀여운 250만원이었다.
다들 유럽 한 달 여행은 최소 500은 넘게 쓰고 오던데 이거 텍도 없는걸..?
여행을 기간을 줄어야 하나 아니면 여행을 미뤄야 하나 고심하고 있던 찰나 하늘에서 옛다 희망줄 하나를 또 내려주셨다.
드디어 사직서 쓴다. 엄마랑 같이 가!
엄마가 10년 간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게 되었다. 아빠는 20대 내내 해외에서 일을 하여 여러 유럽 국가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지만 엄마는 유럽여행이 나와 같이 처음이었다. 엄마와는 가족여행 외에도 둘이서 일본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고 가족이다 보니 친구들보다는 본연의 나로 있기에 편해 나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이전의 여행처럼 엄마를 책임지고 챙겨야 하겠다만, 울엄마는 뭐든 okay인 사람이니 내가 원하는 발길 닿는 여행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부족한 경비를 채워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두 귀에 ghost town 노래를 채우며 엄마와 함께 22살의 11월, 영국행 비행기에 발을 올렸다.
epilogue.
냠냠쩝쩝의 시작유럽 여행은 내게 제대로 된 첫 로컬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 2주 이상 혹은 한 달 이상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꽤나 있었지만 유독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한 달 동안 알찬 고통과 환대를 맛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 고생을 하러 온 것인지 싶을 정도로 정신줄 놓게 만드는 일들의 연속이다 보니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짜증을 늘어놓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여행을 할수록 각기 다른 변수 상황을 통해 노하우를 얻기 시작하였고 처음 만난 여행자들 혹은 현지인들에게 도움과 환대를 받을 때마다 이게 진짜 여행이구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행의 맛을 알아버리기 시작하였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여행의 이유 中> 김영하
계획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시련과 좌절이 있을 지라도 그곳에서 즐길거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 놓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드디어 내게도 생긴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총 5국가의 유럽 에피소드는 몽골, 쿠바여행과 달리 조급한 여행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를 이동하면 할수록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펼쳐지는 낯선 도시 속에서 이 아이가 여행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그 의미가 인생에 얼마나 깊게 들어가지 그리고 한국에서 칸예의 Ghost town을 감상하며 즐긴 상상을 정말 실현했는지 함께 지켜봐 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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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6월부터 로컬 여행자의 여정기를 소개하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
매주 목요일마다
한 달에 1명의 여행자씩
짧고 간결하게
정보성이 아닌 '이야기'를 중점으로
여정의 길을 늘 갈망하는 이들에게 재미난 에피소드로, 일상의 지루한 틈을 타 짧은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경험이 모여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게 만들어 주는 동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행의 이야기들을 모아, 지금 바로 move or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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