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있는 추리작가라 하더라도 뛰어난 탐정 여러명을 탄생시키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실제 여러 추리작가들은 일생동안 소설을 쓰면서 대개 한명의 탐정을 창조하여 그 시리즈를 쭉 이어 썼다. 대표적으로 코난 도일은 셜록홈즈, 밴 다인은 파일로 밴스, 얼 스탠리 가드너는 페리 메이슨, 레이먼드 챈들러는 필립 말로, 미키 스필레인은 마이크 해머를 탄생시켰다.
예외적으로 2명 이상의 탐정을 탄생시킨 작가를 말하자면 엘러리 퀸,드루리 레인이라는 2명의 명탐정을 창조한 엘러리 퀸과 앙리 방코랑, 기데온 펠, 헨리 메일벨등 3명의 명탐정을 창조해낸 딕슨 카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상당히 많은 탐정을 탄생시켜 작품을 집필한 작가가 여기 있으니.. 바로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가 그 주인공이다.
추리소설계에서 유례없는 다작을 한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 작품수만큼이나 정말 많은 탐정들을 탄생시켰는데(물론 여기서 말하는 탐정이란 직업적 사설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속에서 사건해결의 주된 역할을 하는 인물을 말한다.) 각기 한편씩 일시적으로 사건을 해결한 탐정들까지 합치자면 20명 가까이에 이른다.
그 중 2편이상의 복수의 작품에 등장한 탐정들을 언급하자면 (단편집을 제외하고) 총 33편의 작품에 등장한 에르큘 포와로, 14편의 작품에 등장한 제인 마플, 5편의 작품에 등장한 토미와 터펜스, 각기 4편의 작품에 등장한 배틀총경과 레이스대령, 그리고 3편의 작품에 등장한 올리버부인이 있다. (파커파인도 단편집까지 포함하면 복수의 작품에서 등장한다.)
만약, 크리스티가 '포와로' 나 '미스 마플' 만을 주인공으로 선택해 그녀의 전 작품을 집필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녀가 탄생시킨 탐정이 셜록 홈즈를 대체할 명탐정의 대명사로 불릴 수도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신에 독자들은 크리스티 여사만의 독특하고 다채로운 추리소설세계를 십분 경험할 순 없었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여러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그녀의 소설속 세계는 따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세계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녀가 창조한 인물들은 그 가상의 공간안에서 종종 만나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포와로가 여타의 인물을 만나는 설정이다. 혹은, 소설속 세계로 인용되기도 한다)
'나일강의 죽음'에선 레이스 대령이 등장해 포와로를 보좌하고 '죽은자의 어리석음' 에선 올리버 부인이 등장해 포와로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이런 설정이 극에 달한 소설은 바로 '테이블 위의 카드' 인데 이 작품에선 포와로뿐만 아니라 배틀총경, 올리버부인, 레이스대령등 그녀가 창조해 낸 탐정 여러명이 소설속에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왜 '에르큘 포와로' 와 '제인 마플' 의 만남은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역사적인 두 명탐정의 만남은 그런 설정을 자주 선보였던 크리스티 본인의 입장에서도 꽤 재미있는 발상이었을텐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누구 한명의 손을 들어주기가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러명의 탐정이 만나는 작품 안에서도 사건해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포와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플과의 조우에서도 포와로만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만약, 홈즈와 뤼팽을 쓴 작가가 동일인물이라면 둘 중 한명의 우위를 점치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애거서 크리스티.. 일생동안 참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다채로운 작품들을 선보였던 그녀는, 그녀가 창조해 낸 수많은 명탐정들의 개성만큼이나 한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