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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루리 Nov 20. 2021

밤밤언덕(3)

3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역시 어색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뒷자리에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건네 볼까 고민했지만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가 분위기만 더 어색해질까 봐 겁이 나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로 마음먹었다. 


“야, 상우야. 뭐라도 말 좀 해봐.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냐? 아버지를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 쑥스러워서 그래?”


“아니에요.” 


진수 아저씨는 남의 속도 모른 채 날씨가 좋으니 야유회를 가야 하지 않겠냐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힐끗힐끗 곁눈질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창밖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에 뭐라도 있는 걸까? 나는 창문을 열고 달리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날씨가 꽤나 선선해진 것이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었을 테니 바깥공기가 그리운 탓이겠지. 나도 아버지처럼 가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흐르는 동안 난 얼핏 아버지의 혼잣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나도 가고 싶다. 아유회.”


우리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할머니는 벌써 대문 앞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셨다. 차가 완전히 정차하기도 전에 할머니는 다급한 마음에 아버지가 앉아 있는 차량 뒷좌석으로 달려오셨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아버지를 부둥켜안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다독이며 방 안으로 들어가 큰 절을 올리셨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마룻바닥에 걸터 앉아 계셨다. 엄마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남편을 마주하는 기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게다가 엄마는 다른 사람과 남은 생을 살겠노라 결심하곤 집을 떠나셨던 분이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와 엄마는 서로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우리도 남들처럼 다시 평범한 가족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 집은 몇 번의 보수작업을 거치긴 했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떠나실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별 어려움 없이 집안 곳곳을 쭉 살던 집인 양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낡을 대로 낡은 허름한 집이지만 아버지는 그게 되려 더 좋았나 보다. 마루에서 방까지 몇 번을 왔다 갔다 하시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으니까. 엄마는 할머니 옆에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마련해 놓으시곤 작은방으로 들어가셨다. 평상시에도 남들보다 대화가 많지 않은 집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오신 그날 역시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오신 첫날밤이 조용히 저물어 갔다.     


아침이 밝았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냥 침대 위에 누워만 있었다. 한참 전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있었지만 방문 밖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려오자 갑자기 나가기가 싫어졌다. 아버지를 보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아침부터 같이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나? 괜히 걱정이 되었다. 머리로는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되뇌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다르게 반응했다. 침대 위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리다가 학교 갈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쭈뼛쭈뼛 거실로 나갔다. 


“상우야, 일어났니? 오늘은 좀 늦었다. 어서 밥 먹어라.”


엄마는 밥상 위에 내 밥만 올려주셨다.


“아버지는요?”


갑자기 왜 아버지에 대해 물었는지 나도 모른다. 말을 하고 난 후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엄마 역시 아버지를 찾는 나의 질문에 놀라셨는지 잠시 멈칫하셨지만 이내 덤덤하게 대답하셨다.


“집에 안 계신다. 아침 일찍 나가셨어.”


“그래요?”


이윽고 할머니가 방에서 나오시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우리 상우가 일어나자마자 아버지 안부부터 묻고 참 기특하구나. 아버지는 아침 일찍 진수 아저씨랑 나가셨단다.”


아버지는 출소자 취업지원 단체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가셨다고 한다. 아마도 진수 아저씨가 주선을 한 모양이다. 할머니는 이제 막 집에 왔는데 뭐 하러 급하게 그러냐며 나무라셨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듯하다. 빨리 뭔가 일을 해서 가정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나는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맞아, TV 드라마에서 한 번쯤 본 듯하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는 누군가의 이야기. 뭐랄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낯선 사람의 이야기랄까. 


다음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저녁 늦게나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그마저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공부하고 이제 돌아오는 거니? 고생이 많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씻고 어서 밥 먹자.”


나는 그날, 저녁 식사를 걸렀다. 그렇게 의도적으로라도 아버지를 피하고 싶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왜 이러지? 진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나 보다. 아버지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 당신을 외면하는 일상을 반복하였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신지 보름쯤 지나던 날이었다. 저녁식사시간, 아버지는 뭔가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식탁에 앉아 말씀하셨다.


“어머니, 저 내일부터 일하러 나가요. 취직이 됐어요.”


“그래? 그거 정말 잘 됐구나.”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아버지의 손을 맞잡으셨다. 지난 몇 년간 할머니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 역시 아무 말은 없으셨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던 모양인지 아버지의 밥 위에 조심스레 반찬을 올려다 주셨다. 집안 분위기가 점점 바뀌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뭔가 축하의 말이라도 건네야 하나 고민했지만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학교생활은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출소 소식에 술렁이는 친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상우 아버지가 정말 그랬대.”


아버지가 수감 중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던 친구들도 이제는 아버지의 죄목까지 낱낱이 알게 되었다. 내 등 뒤에서 속닥거리는 친구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급기야 내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물들었다. 그냥, 그곳에 쭉 계시지 뭐 하러 나오셨어요. 내가 괜히 손가락질 받잖아요. 못된 놈. 나는 참 속이 좁은 놈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주변의 시선 속에서도 단짝 친구 종수만은 예외였다. 


“상우야, 우리 다음 주에 마을축제 갈까?”


1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종수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와 말했다. 


“축제? 그게 다음 주였나?”


“그래, 소희도 간 대잖아. 너 다음 주 생일이니까 날짜도 딱이지? 어떠냐? 이 형님의 아이디어가. 내가 분위기를 잡아 볼게.”


“소희도 간다고?”


나는 앞자리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희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반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친구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 착하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고등학교 입학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소희가 내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상우야, 안녕?”


“으..응. 안녕 소희야.”


소희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소희의 얼굴을 마주 보다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 기억 안 나는구나?”


“응? 그..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가람 초등학교 4학년 3반. 기억 안 나?”


내가 4학년 때 3반이었던가. 애석하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기억이 나는 척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희가 나에게 묻지 않는가.


“응. 기억나.”


소희는 씽긋 눈웃음을 짓다가 이내 나를 흘겨 보았다. 


“정말 기억나는 거 맞아? 아닌 것 같은데.”


“아냐, 아냐. 정말이야. 왜 내가 너를 모르겠어. 당연히 기억하지.”


“그렇담 다행이다. 있지, 나 그때 너 좋아했었거든. 이번에 학교에서 너 보자마자 깜짝 놀란 거 있지.


정말? 소희가 날 좋아했다니. 화끈거리는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참, 너 이번에 수행평가 과제 정했어? 나랑 지현이랑 같이 할래?” 


“그래. 같이 하자.”


나는 소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희는 활짝 웃었다. 그날 이후 소희의 환한 미소를 보는 건 나의 학교생활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곧 그녀의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하긴, 어릴 때 좋아했던 기억만 가지고 연인 사이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지. 이내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의 출소 소식을 듣고는 소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행여 나를 싫어하게 된 건 아닐까?


“응? 어떡할래? 왜 대답이 없냐?”


나는 나를 다그치는 종수의 핀잔을 듣고서야 가까스로 소희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소희와 함께 주말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그래, 좋아. 나도 갈게.”


소희뿐만이 아니다. 생일이랍시고 아버지와 또다시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석이조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상우야, 생일 축하한다. 많이 먹어라.”


생일날 아침이 되자 가족들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나를 반겼다. 엄마는 내 국그릇에 한가득 미역국을 담아주셨고 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에 오만원을 쥐여 주셨다. 생일날 미역국을 먹은 게 몇 년 만이던가. 엄마마저 안 계시던 지난 몇 년간은 어쩔 수 없이 생일을 잊고 살았다.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아침 식사시간이라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는 슬쩍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생일인 나보다 더 기쁜 모양인지 손뼉을 치시며 연신 웃고 계셨다. 그 모습이 왠지 짠하게만 느껴졌다. 아침 식사시간이 끝나고 잠시 후 아버지가 노크를 하시고는 슬그머니 내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우야, 좀 들어가도 되겠니?”


“네. 들어오세요.”


잠시 뜸을 들이시던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며 나에게 작은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상우야, 이거 받아라. 선물이야.”


“선물이요?”


“그래, 생일 축하한다.”


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말없이 선물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박스 안에는 최신형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핸드폰이네요. 저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지, 상우 네 거야.”


“이거 비쌀 텐데. 근데, 돈은 어디서 나셨어요?”


“응. 교도소안에서 좀 모아 놓은 게 있었으니까.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마음에 드니? 그게 요즘 제일 인기 있는 거라고 하던데.”


“네. 좋아요. 괜히 무리해서 안 사주셔도 되는데. 암튼 고맙습니다.”


“그래, 그래, 잘 썼으면 좋겠구나.”


아버지 얼굴이 싱글벙글이시다. 선물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의 기쁨이 더 크다고들 하던데 지금 아버지 모습을 보니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없을 것 같다.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신 후 나는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다시 꺼내 보았다. 평소에 핸드폰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버지가 사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껏 반복되는 아버지에 대한 묘한 감정이 당신이 사 주신 핸드폰에 그대로 이입되는 기분이다. 나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책상 서랍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선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평소에는 초저녁만 되어도 사람들의 행적을 좀체 찾을 수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마을 축제를 맞이할 때면 읍내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유일한 행사이기에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은 참 대단했다.


“우리 마을에 이렇게 큰 국화밭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이야. 안 그래?”


“그럼, 그렇고말고. 우리 마을 최고의 자랑거리인데 두말하면 잔소리지.”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졌음에도 인근 도시에서 찾아오는 차량 행렬은 끊이지 않고 줄을 이었다.


“상우야. 여기야. 여기.”


축제가 한창인 광장 근처에서 종수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종수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종수는 내 목에 팔을 두르며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애들아, 상우 왔어. 다들, 상우 알지?”


그곳에는 평소 가까웠던 친구들뿐 아니라 그냥 얼굴만 알고 지내는 다른 반 친구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끼리 속삭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괜한 오해가 아니라 분명히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나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까. 그들은 어느새 큰 소리로 그 옛날 아버지의 살인사건에 대해서 가타부타 논쟁을 하고 있었다. 괜히 온 게 아닐까? 나는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주도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종수의 노력 덕분에 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멀리서 여자친구들이 한데 무리를 지어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 사이에는 소희도 함께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의 그녀였지만 오늘은 유독 더 해맑아 보인다. 내 눈에는 그녀의 모습만 보였다. 오늘도 변함없이 그녀는 예쁘다.


“엇, 상우 왔구나. 상우야.”


소희는 내 곁으로 바싹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상우, 오늘 생일이라며? 축하해. 왜 말 안 했어? 진작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빈손이라서 어떡하지. 미안해서.”


"아냐, 괜찮아."


소희와 한참을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걸 아니꼽게 생각하는 녀석들 때문인가. 아니, 어쩌면 소희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이 빈정 상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민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상우 너희 아버지는 지금 뭐 하시고 있어?”


“응?”


“너희 아버지 말이야. 오늘부터 마을 축제날인데 한 번쯤은 여기 오실 거 아냐? 안 그래?”


나는 민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 앞에서 나를 무안하게 만들기 위함인 걸까?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네가 너희 아버지 못 오시게 잘 관리해 인마. 여긴 술도 많은 데다 여자들도 많은데 문제가 생길지 또 어떻게 알아.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고, 안 그래?”


민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바보였다. 민호가 그런 모욕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종수가 나대신 나서서 화를 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게 지금 여기서 할 소리야?”


“뭐야? 종수 네가 왜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어? 지금 상우 아버지 때문에 마을 전체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한테도 여동생이 있다고. 나도 지금 조마조마 하단 말이야. 저 자식 아버지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 나중에 큰코다쳐봐야 다들 깨달으려고 그래?”


나는 민호가 우리 아버지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소희가 그 얘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할는지가 걱정이 되었다. 슬쩍 소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희는 가만히 서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소희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니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소희가 갑자기 민호에게로 다가가 녀석의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야? 소희 너 왜 그래?”


“민호 너, 그렇게 말하는 거 아냐. 그런 얘기를 상우에게 왜 하는 거야? 그건 상우 탓이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 그런 얘기를 이곳에서 하는 이유가 뭐야?”


민호는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나는 정말 순수하게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었어. 그렇잖아. 상우 아버지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넌 네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구나. 너는 괜히 나서서 있지도 않은 논란거리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어. 그게 더 나쁜 거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의 입이라는 거 알아?”


소희가 내 편을 들어주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순간 소희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민호를 그 자리에 홀로 남겨 둔 채 자리를 옮겼다. 나는 뒤를 돌아 민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민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씩씩대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환한 조명이 꽃들 사이를 비추는 통에 밤에 보는 국화는 낮에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제각기 꽃을 보러 간 친구들과 잠시 멀어진 사이 종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상우야,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민호, 그 자식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얘가 워낙 건방져서 말이야. 평소에도 말이 많았다나 봐. 그냥 잊어버려. 알겠지?”


나는 내 어깨를 두드리는 종수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씩 웃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소희 진짜 대단하더라.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데 민호 뺨을 때릴 줄이야. 너도 놀랐지? 혹시, 소희도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네가 전에 그랬잖아. 소희가 예전에 너 좋아했었다고.”


“에이, 설마.”


“그렇잖아. 누가 남의 일에 발끈해서 저렇게 행동하겠어? 옆에 가서 말도 하고 남자답게 좀 굴어 봐. 내가 한 번씩 보면 너 너무 답답해서 미친다니까. 이런 좋은 기회를 왜 날려 버리냐?”


종수의 말이 맞다. 나는 그동안 아무 이유 없이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친구들 머릿속에도 별다른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아 존재감 없는 녀석일 뿐이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출감 소식 때문에 처음으로 ‘나’라는 존재가 알려졌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친구들은 중앙광장에 모여 저마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희 옆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커피를 건넸고 소희는 항상 그랬듯 변함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고마워, 소희야.”


“응? 뭐가? 아. 민호 때문에 그래? 신경 쓰지 마 상우야. 민호가 너무한 건 사실이잖아. 걔는 정말 정신 좀 차려야 해. 너무 개념이 없어.”


그녀의 반응이 종수랑 비슷해서 웃음이 나왔다.


“상우야, 아버지 때문에 괜히 맘 쓰지 말고 신나게 놀자. 오늘은 네 생일이잖아.”


소희가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 걸까. 잠시 후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그렇게 예쁜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었다. 수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불꽃들이 나의 마음까지 들뜨게 만들었다. 나는 소희 옆에 바짝 붙어서 그녀의 얼굴과 반짝이는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생일.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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