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루리 Dec 13. 2021

밤밤언덕(4)

4

우리 가족의 일상도 내 마음처럼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직장에 나가셔서 열심히 일하셨고 엄마도 이제는 아버지와 한방을 쓰시며 아내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셨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신 직후의 며칠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도 남들 보기에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그런 평범한 가정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침, 저녁으로 내가 들고 다니는 핸드폰을 유심히 살펴보셨다. 아마 내가 당신이 사주신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 내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상우야, 핸드폰이 맘에 안 드니? 계속 예전 거를 들고 다니는구나.”


“아, 그거요. 이게 오래돼서 편해서 그래요. 나중에 사용할게요.”


“그래? 그렇구나. 그래 뭐, 나중에 사용하면 되지.”


나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사실, 지난주에 아버지가 나에게 사 주신 핸드폰을 소희에게 선물로 줘 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겐 참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핸드폰 덕분에 꿈에 그리던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런 이유라면 아버지도 분명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요즘 들어 소희와 같이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날도 변함없이 점심을 먹고 난 후 소희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떡하냐, 정말. 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건데.”


지현이 소희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이고 있었다.


“왜? 소희야. 무슨 일 있어?”     


“응, 그게. 소희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대, 완전 최신폰인데. 누가 훔쳐 갔나 봐.”


속상한 탓에 말없이 앉아만 있는 소희 대신 지현이 대답했다.


“정말이야?”


“응, 그거 소희 삼촌이 지난주에 선물로 사 주신 거거든.”


나는 며칠 전에 소희가 선물 받은 핸드폰을 자랑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소희가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보다 그녀의 핸드폰이 아버지가 나에게 사 주신 핸드폰과 같은 기종이라는 사실에 눈길이 갔다. 소희랑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고 싶었다. 스스로가 한심하리만치 구차한 생각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그 상상만으로도 벌써 소희의 남자친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흐뭇해졌다. 


“소희야, 그 핸드폰 내가 줄게.”


“응?”


소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갑자기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그녀가 원하는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나 그 핸드폰 새 거 있거든.”


소희는 당황한 듯 나와 지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럼 너는? 너도 써야 하잖아.”


“아냐, 난 지금 가지고 있는 게 더 좋아서 그래. 괜히 바꾸기도 귀찮고 말이야. 진짜 필요한 사람이 가져야 더 가치가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소희는 고민이 되는 듯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래, 그거 엄청 비싼 건데.”


“정말 괜찮아. 나는 쓰지도 않는 건데. 너한테 주고 싶어서 그래.”


딩동댕동,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통에 우리의 대화도 거기서 끊겨 버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소희는 핸드폰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바보. 선물로 주는 거라고 말했어야지. 바꾸기 귀찮아서, 쓰지 않는 거라서 주고 싶다니.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나지막이 내려앉은 밤공기를 마시며 학교 운동장을 힘차게 뛰었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혼자 뛰고 있노라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다. 세상의 중심에 나만 존재하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소희가 내 발 앞에 성큼 다가올 때까지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상우야, 뭐해?”


“앗!”


난 깜짝 놀라며 소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넓은 운동장에 소희와 나 둘밖에 없다.


“소희야, 이 시간까지 집에 안 가고 뭐 했어? 벌써 7시가 넘었는데.”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가까이서 얼굴을 확인하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는 넌?”


“나? 난, 좀 뛰고 싶어서 말이야. 평소에도 자주 달리거든.”


사실은 종수랑 일대 일 농구를 하기로 했다.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무래도 종수에게 바쁜 일이 생긴 모양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닐까. 조금만 더 늦게 와 준다면 좋을 텐데. 


“나는 학교에 책을 놔두고 와서 가지러 왔어. 그런데 멀리서 보니까 누가 운동장을 뛰고 있더라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라서 좀 무서웠는데 한참을 쳐다보니까 꼭 상우, 너 같은 거 있지. 근데 내 눈이 정확했네.”


소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랬구나.”


“운동은 이제 끝난 거야?”


“응, 으응..”


“그럼, 혹시 시간 있어? 괜찮으면 나 집에 바래다줄 수 있어?”


순간, 종수와의 약속은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아무려면 어떤가. 종수도 분명히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그래. 잠시만, 저기 가서 가방 좀 가져올게.”


나는 힘차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전에 없던 새로운 힘이 샘솟는 것 같다. 

소희와 나란히 골목길을 걷는다. 남들 눈에는 정말 연인처럼 보일 것만 같다. 손을 잡아 볼까? 어깨에 손을 올려 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실행에 옮기지도 못할 쓸 데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작 소희와 걷는 내내 나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못했다. ‘기회가 생겼는데 왜 붙잡지를 못하니?’ 종수의 핀잔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다 왔어. 여기가 우리 집이야. 고마워 상우야."


가까이에서 본 소희의 집은 상상하던 이상으로 예뻤다. 낡고 허름해진 우리 집과는 비할 바가 없다. 사실, 이미 여러 번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인 적이 있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목에서 소희의 집을 지나쳐야 했기에 자연스레 그녀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희와 함께 걷는 이 길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상우 덕분에 집에 잘 왔어. 저 앞에 골목이 너무 무서웠거든.”


나는 소희가 가리키는 골목길을 쳐다보았다. 가로등 몇 개가 서 있었지만 불빛이 지지직거리고 있어서 시야를 온전히 밝혀 주진 못했다. 그 순간, 하늘에 계신 누군가가 힘없는 나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듯했다. 사랑에 빠지면 그런 것일까?


“소희야, 앞으로는 내가 가로등이 되어 줄게.”


이런.. 하늘아, 차라리 용기를 주지 말 것을. 이렇게 멋없는 고백이 또 어디 있담. 영문도 모른 채 소희는 한참이나 멀뚱멀뚱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좀 전의 용기는 모두 달아나 버렸는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하하하”


소희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바로 내 눈앞에 서 있다. 그녀는 살며시 나를 안아 주었다.

     

이전 03화 밤밤언덕(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