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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루리 Dec 28. 2021

밤밤언덕(5)

5

명훈은 오늘도 밤늦은 시간까지 작업에 열중했다. 명훈이 하는 일은 공장에서 폐기물을 주워다 나르는 일이다. 소위 말해 공장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철야가 진행되지 않으면 원청업체가 요구하는 물량을 맞출 수가 없는 회사 입장에선 명훈처럼 묵묵히 일을 해 주는 사람이 꼭 필요했다. 게다가 포괄임금제라는 제도의 모순점을 악용하여 최저임금만 지급하고 주휴수당과 야근수당을 제하더라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박 씨, 이리 와서 한잔해.”


“아뇨, 전 괜찮습니다. 저는 상관치 말고 맛있게들 드세요.”


명훈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2교대 야근자들의 식사시간이다. 근무 중간에 술을 마시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야 함에도 이 공장에서는 근로자들이 몰래 술을 한 잔씩 받아넘겼다.


“캬, 좋다. 새벽 근무는 이래서 좋단 말이야. 눈치 볼 사람들이 있길 하나, 이렇게 술도 한 잔씩 할 수 있고 말이야. 안 그래?”


생산반의 관리 책임자인 병욱은 시원하게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래도 직장님, 딱 한 잔만 하셔야 돼요. 혹시나 야간작업에 펑크라도 나면 큰일 아닙니까?”


“하, 참 그 쓸데없는 소리, 김 씨는 우리 직장님, 실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걱정하지 마요.”


명훈은 힐끔힐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식사를 하기 위해 자신의 도시락을 열었다. 2주일에 한 번씩 철야를 하는 날이면 아내가 어김없이 도시락을 챙겨 주었다. 사실,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굳이 밤잠을 설쳐가며 야간근로를 해야겠냐고 몇 번이나 명훈을 말렸다.


“괜찮아요, 엄마. 그동안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지금이라도 많이 벌어 놔야죠. 조금 있으면 상우 대학도 보내고 장가도 보내야 하니까요.”


명훈은 밥 위에 올려진 달걀 프라이를 꿀꺽 집어삼켰다. 명훈은 달걀 프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수감생활을 하면서 달걀 하나에 울고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깥세상에 나가면 원 없이 달걀을 먹겠노라 늘 다짐했었다. 그래서 명훈은 도시락밥 위에 올려진 달걀 프라이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행복을 느꼈다. 명훈의 시야에 하나둘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남들보다 늦은 식사시간이지만 명훈은 그마저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얼른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바로 맞은편에서 소주를 들이켜고 있는 병욱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명훈은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주섬주섬 도시락통을 챙겼다. 병욱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임무를 100% 완수해 내는 사람이다. 소주 서너 잔을 마시면 몸에 취기가 올라 알딸딸한 것이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진다며 이해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긴 했지만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철두철미 한지 모른다. 생산 수량을 맞추지 못하는 젊은 노동자들은 언제 병욱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수 없어 노심초사했다. 명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공장 허드렛일만 하다 보니 내가 뭔가를 책임질 필요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되려 마음이 편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그 또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체력이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3시가 넘어간다. 사람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때라 이 시간을 잘 버텨야만 한다. 병욱의 임무는 근로자들이 집중력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컨트롤하고 관리 감독하는 일이다. 병욱은 공장을 한 바퀴 쭉 돌며 근로자들의 근무상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누군가에게 귓속말로 지시를 했다. 공장 구석 한켠에서 폐자재를 정리하던 명훈은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지난주부터 야간에만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말했다.


“박 씨 아저씨. 직장님이 이따 쉬는 시간에 직장님 방에서 잠시 보자시네요.”


“네? 저 말인가요?”


“그럼, 여기 박 씨가 아저씨 말고 또 있어요.”


야간 아르바이트생은 툴툴대며 자리를 떴다. 직장님이 호출을? 왜 그러는 걸까?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혹시 일을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읍사무소에서 자리를 마련해 준 건데 그리 쉽게 내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명훈은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진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별로 힘들지 않을 거야. 그냥 공장 잡일이라고 하니까 조용히 시키는 것만 하면 돼. 누가 딱히 너에게 요구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말이야. 그런데 만약에 야간근로를 하게 된다면 고병욱이라는 사람을 조심해야 해. 그 사람이 관리자인데 눈밖에 나면 큰일 난다니까 그것만 명심하고 있어. 알겠지?”


명훈은 터벅터벅 병욱의 방앞으로 다가갔다. 기계실 창문에 자신의 얼굴을 쓱 훑어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더러워진 손을 바지에 쓱쓱 닦고는 병욱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병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와요.”


명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좋아서 방이지, 그냥 공장에서 사용하는 허름한 창고나 다름이 없었다. 망치와 스패너를 비롯한 각종 공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방안에 작은 철제 책상과 의자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병욱은 힐끔 명훈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자신의 옆에 있는 의자를 내어 주며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명훈은 90도로 절을 하며 병욱이 건네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직장님,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으셨나요?”


병욱은 아무 말도 없이 명훈을 쳐다보다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박 씨 사정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교도소에 있다가 얼마 전에 나오셨다죠?”


아, 그 얘기는 아니었으면 했는데.. 명훈은 순간 기가 죽어 버렸다. 내가 수감생활을 했던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하다. 어떡하지?


“아, 네.”


명훈은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한참이나 늦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저랑 얼추 나이도 비슷하신 것 같지만, 그래도 제가 관리자 직책이다 보니 격식 차리지 않고 편하게 말할게요. 박 씨, 거두절미하고 지금 하는 허드렛일 말고 프레스 기계를 한번 잡아보는 게 어떻겠어요?”


“네? 프레스 기계요?”


“네, 맞아요. 저 밖에 다들 하고 있는 일 말입니다. 그게, 요즘 원체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죠. 젊은 사람들은 공장일을 다 안 하려고 해요.”


프레스 기계라니? 명훈은 한 번도 이런 계통의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라면 마음도 편하고 걱정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일평생 기계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내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명훈은 당장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지켜보니까 박 씨가 참 야무지게 일을 잘 하더란 말입니다. 지금은 최저시급도 제대로 못 받고 일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기계를 잡게 되면 임시직이 아니라 정직으로 제가 추천을 할까 합니다. 급여도 그만큼 대우해서 드리도록 회사에 말을 해 볼게요. 어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명훈은 깜짝 놀랐지만 그보다 자신을 좋게 봤다는 병욱의 말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늦은 나이지만 가족 외의 누군가에게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칭찬이었다. 명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겠노라 마음먹었기에 자신을 챙겨주는 윗사람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네, 할게요. 하겠습니다.”


명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병욱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늦은 만큼 더 열심히 일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일단 박 씨는 할 생각이 있단 말이죠. 제가 아직 사장님께는 보고를 드리지 않은 일이라 이번 주에 되는대로 다시 말씀을 드릴게요. 그때까지는 지금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병욱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제 그만 나가 보세요.”


명훈은 병욱의 방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90도로 꾸벅 절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아침해가 환하게 공장 안팎을 비추고 있었다. 남들은 바쁜 출근시간이겠지만 명훈은 그제야 퇴근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기분이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윗사람의 인정을 받는구나. 점점 사회의 일원이 되어가는 것 같아 뿌듯해졌다. 명훈은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읍내 빵집에 들러 보슬보슬 갓 구워낸 팥빵 열 개를 손에 들고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6

소희와 설익은 연애를 시작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났지만, 그 사실을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비밀연애를 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 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소희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소희 역시 수업 중간에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그녀와의 연애를 사방팔방 자랑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런 비밀스러운 연애도 전혀 나쁜 것 같지 않았다.


“얘 좀 봐, 또 이렇게 웃고 있네. 야, 상우야. 정신 좀 차려 인마."


점심을 먹다 말고 배시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종수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야,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요즘, 왜 계속 넋 나간 사람처럼 그래?”


“아냐, 아무것도.”


“에,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대체 무슨 일이람?”


눈치 빠른 종수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종수는 나의 얼굴과 식당 저 멀리 앉아 있는 소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


“뭐야, 너 소희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야, 조용히 좀 해. 얘들이 듣겠어.”


나는 얼른 일어나 종수의 입을 막았다. 종수는 미안하다고 손을 모은 후,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정말이야? 이 자식. 얌전한 고양이가 어디 먼저 올라 간 대더니. 딱 그 꼴이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대신, 모른 체 좀 해 주라. 응?”


“왜? 아.”


종수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인마. 와~ 우리 상우 이제 다 컸네. 알아서 연애도 다 할 줄 알고.”


종수의 부러움 섞인 말투마저 즐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소희와 나는 이토록 비밀스러운 연애를 하게 된 것일까? 소희는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게 싫다고 말했다. 한참 공부를 해야 할 시기인데 괜히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생각건대 아마 아버지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소희 역시 남자친구가 범죄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 테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출감해서 마을로 돌아오시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소희의 부모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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