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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May 02. 2024

바보들이죠! 라고 노무사가 그랬다

해고 통보 셋째 날

참 시간이란 건 야박하리만치 흘러 아침이 되었다.

지금 니가 출근해서 뭐가 달라지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면서 일어나 앉았다. 루틴처럼 아이 셋은 눈을 반짝이며 간식...? 하고 있다. 아침 루틴이다, 눈뜨자마자 간식.


그러니까 나의 일상은 뭘 더 어쩔 수가 없이 얼그러졌어도 나의 아이들의 일상은 여전히 동일하고 나는 그걸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다


늦은 새벽까지 신점&타로를 뒤적거리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나의 손가락이 머문 곳은 노무 상담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 좋게 좋게 회사가 밀어내는 대로 곱게 퇴사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내가 갈아넣은 2년이 너무 쓰레기처럼 취급되는 게 마음이 아프니까. 




세상을 살면서 별 탈 없이 큰 일 없이 살아가는 것도 굉장히 큰 축복이지만, 어쩌면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되는 것도 꼭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내가 언제 '해고예고수당'이나 '권고사직과 해고의 차이' 따위를 검색해볼 거였으며 노무사를 찾아볼 생각을 했을까.


오전에 예정되어 있던 면담 전 상담 받고 싶었고 운 좋게도 출근길에 바로 상담을 받을 수 있었는데... 잘했단다. 자기랑 같이 노동청 가면 못해도 5개월 월급은 확보란다. 녹음도 하랜다. 아, 싶었다. 불과 며칠 전 공지가 떴었드랬다. 당사자 동의가 없는 녹취는 처벌 받는다.


그 말에 노무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안 하실 거에요?

이틀 전 연봉과 직급 삭감하고 근무할래? 라는 제안은 유효한지를 물었을 때도 역시 양아치... 라고도 했다.



아... 역시 인간은 알아야 덜 쫀다. 라는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두번째 면담이 점심 이후 시작되었다.

뭐 이미 기대하지도 않았고, 실상 이렇게까지 된 것 더 있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다만, 곱게 그들이 바라는 대로 나가고 싶지는 않을 뿐.


사실 인사팀장님과 나는 꽤 다른 관계로도 친밀도가 있고 디테일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전우애'라는 것이 존재하는 사이이다. 면담 중간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껄끄러워하고 미안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팀장님은 팀장님대로, 나는 나대로의 이야기를 전할 수 밖에 없었다.


요는 이거였다.


A : 전과 똑같다. 나가야 한다.


B : 저는 근무를 계속 하려는 건 알고 계시지 않냐.


A : 안 된다. 


B : 뭐가 문제냐. 정말 내 근무 능력이나 태도가 문제인 거냐. 


A : 그게 아닌 걸 알지 않냐.


B : 그러니까 안다. 그래서 나 해고인 거냐. 언제까지 이야기인 거냐.


A : 5월 말일까지 근무하면 될 것 같은데 회사 상황이 있으니 권고사직으로 이야기하자. 부탁한다.


B : 그럴 수는 없다. 이미 회사가 나에게 정당한 사유를 제공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내보내면서 그것까지 부탁한다면 최소한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


A : 그럼 뭘 바라냐.


B : 최소한 3개월의 권고사직 위로금은 필요하고 당연히 퇴직금, 연차정산, 실업급여야 해고든 권고사직이든 신청 가능한 거고.


A : 어려울 거다. 5월 말까지 출근하든 하지 않든 급여는 지급될 것이고 그게 다다.


B : 받아들이기 힘들다. 부탁하신다 하셨는데 내가 내거는 조건은 3개월 급여분이다. 이 정도는 지급해야 하는 거 아니냐.


A : 진흙탕 싸움은 피하고 싶다. 본인도 해고가 안 좋은 거 아니냐.


B : 그건 나도 팀장님 얼굴 봐서라도 안 그러고 싶고 지금 이게 얼마나 마음 안 좋은지 서로 알지 않냐.


A : 대기발령이 내려갈 수도 있다. 앞으로는 따로 더 면담할 일은 없을 것이다.


B : 알겠다.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하자. 이렇게 진흙탕이 되어도 나중에 퇴사 후에 연락하면 피하실 거냐.


A : 내가 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래도 나한테 연락하기 싫어질 거다.


B :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나는 던졌다. 나머지는 회사에서 정하는 거고.





다시 노무사를 찾아 이야기를 나눴을 때 녹취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어떤 것을 제시했는지 (3개월에 대해서 적당하다는 의견), 그리고 대기 발령이란 게 뭔지를 알아야지... 앞에서는 어쩔?! 이라는 태도였지만 실은 20여년간 회사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드라마에서나 봤던 단계를 내가 실제로 겪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 워치에서는 "심박도 높음"이라는 알람이 계속해서 울려댔다.


노무사는 일단 기다려보자며, 공은 회사쪽으로 넘어갔고 만약 대기발령을 받는다고 해도 자택 대기 혹은 출근 대기가 있지만 급여는 나올 수 있다. 무급일 수도 있다. 라고도 했다. 물론 그것도 노동청으로 가면 싸워 받을 수 있고. 

검색한 바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도 하다.


근로자를 대기발령 처분했을때 지급 급여(월급) 삭감 한계와 범위


그 와중 이전 회사 HR을 담당하던 분께 연락을 드렸다. 어느 회사 대표로 계신다고 했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솔직 담백하게 말했다. 잘 지내시죠!? 저 일자리 좀 구해주세요!!


딱! 머리에 들어왔어요. 퇴사하고 한 번 봐요~ 라는 목소리 하나에도 위로받는 느낌이라니... 

강한 척 해도 나는 지금 덜덜 떠는 게 맞나 보다. 




일단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지금 상태에서 나를 내가 괴롭혀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더구나 지금 이 회사에서는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는 걸 그 내용을 전하는 사람까지 인정한 마당에, 내가 나를 갉아먹고 싶진 않았다.


뭐 먹고 살지? 라는 파트에 대해서는 편의점 알바를 하든, 퇴직금을 까먹든 그도 아니면 배민 배달을 하든 몸이 고단해질 뿐, 먹고 사는 건 뭔 짓을 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도 생각하니 무너져 내려앉았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기둥이 선다. 

그 주춧돌 하나가 눈물 나게 고맙다.


이 회사로 나를 이끌었던 분(지금은 혼자 치사하게 먼저 퇴사, 쳇)이 통화한 대표님과 함께 전회사 C레벨이었는데 해당 내용을 전하니 잘 됐다! 해주신다. 


그래서 그 주춧돌 위에 돌 하나가 더 얹어진다.


가봐야 알겠지만, 통화했던 전 C레벨, 현 대표님이 있는 회사는 검색 결과 꽤나 앞길이 창창한 회사였고 전체적인 뉴스 기사와 회사 비전을 보니 내가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보였다.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님에도, 내 능력과 비전, AS IS와 TO BE를 보이기도 전에 "나이"로 컷되는 불상사는 없다는 자그마한 희망이


또 돌 하나를 쌓아준다.


그렇게 셋째날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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