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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May 31. 2024

엄마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해고 통보 후 마지막 날

어느 날부터 내가 내비게이션을 더 이상 켜지 않는다는 걸, 오늘 아침에 문득 깨달았다.

그냥 차에 앉아서 폰 거치를 하고 운전하는 한 시간 동안 들을 강의 같은 걸 핸드폰으로 뒤적거리거나 머리 복잡한 날은 미리 세팅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두는 게 일종의 루틴처럼 몸에 박혀 있는 거다.  이젠 어떤 길에서 감속해야 하고 속도 측정이 있는지, 어느 지점까지 가선 차로로 변경해야 빠르게 빠져나갈 있는지 정도는 하지 않아도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기억하는 테지.


이제 길이 오늘로써 끝이다. 그래서 내비 속 '회사'를 지웠다.


그래서 내 기분이... 어... 슬프다거나 서럽거나, 서운하거나 또는 뭐 그런 기분은 없다.

해고당하는 사람 치고는 뭐 덤덤한가? 싶기도 한데, 사실 계속 슬프거나 억울할 수는 없으니까.


그건 선택의 몫이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거기 계속 머물 건지, 아니면 나올 건지 최소한 나오려고 애는 써볼 건지.
옳고 그른 건 없지만 나는 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쪽이니까, 그걸 선택할 뿐.




어제 퇴근길에 틀어놓은 영상서 카테고리가 타고 돌아 방구석 1 열이라는 영상이 플레이되었고 마침 우연히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라는 영화소개가 있었다.


일단 우리 회사는 블랙 기업은 아니다. 어... 다크 그레이.. 정도? 그리고 나는 주인공처럼 맥없이 당하지도 않고. 하지만 그가 느끼는 절망감, 무력감에다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무가치함에 대한 감정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그건 강도의 문제이지, 없을 수는 없으니까.


어제 우연히 스쳐가다 만난 인사팀장은 인수인계 잘 되어가?라고 웃으며 물었다. 나도 웃으며 다 됐습니다. 답했다. 어휴, 나 요즘 일 너무 많아졌어, 지쳤어.라는 말에는 그냥 웃었다.  직속 상관이기도 했으니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일의 볼륨을 늘리는 걸 그냥 받아들이는 건 한계가 있습죠.라고 그냥 속으로 말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또 말한다. "살아있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야."

아무렴, 그렇고 말고.





아- 화창하다. 날씨가 기가 멕히다.

이 좋은 날에 아침에 마주한 막내 강아지양은 컨디션 10점 만점에 11점이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코 앞에서 알짱거리는 아이. 그 아이의 말캉하고 작은 젤리가 콕콕 박혀 있는, 작은 손을 붙들고 말했다.


엄마, 잠깐만 회사 관두고 올게. 금방 올게.


그러자 아이는 히이이잉- 하고 울었다.(.... 말이세요?)

이렇게 예쁘고 다정한 아이들이 아직 있는데 뭔들 못 할까. 무조건 낙관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비관적이지도 않다. 맞다. 살아있으면 뭐든 어떻게든 된다는 건 변함이 없다.


이제 오늘 오전을 잘 마무리하고, 점심을 먹고 서류를 작성하고 그리고 길을 나서면 드디어 이 길었던 전쟁의 마침표가 찍힌다. 일단 그것부터 마무리하자. 일단 그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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