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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Jun 04. 2024

잘 있어요, 다들.. 아프지 말고 슬프지 말고

해고 통보 이후 이야기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퇴사를 했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금요일에도 점심 먹고 땡 치고 나온 게 아니라 나온 게 거의... 16시? 그러니까 퇴근 두 시간 앞두고 나온 터라 그냥 조퇴 기분이었고 주말은 그리 보냈고, 그리고 화요일인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미뤄둔 휴가를 받는 기분 정도이지 뭐가 특별하게 다른 건 없었다.

아침에 날아든 '근로자격상실신고서'가 날아오기까지는.


이런 건 겁나 빠르고만! 핫핫! 하고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불안감. 불안감이라. 사실 불안감도 없는 상태인 게 더 맞는 것 같다.




나는 늘 한 템포 느리다.

감정적인 측면이 유독 그러하다. 슬플 때 슬픈가? 하다가 뒤늦게 쿠콰콰캉! 하고 두들겨 맞고, 힘든가? 아닌 거 같은데, 하다가 나중에 그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아놔, 힘들었던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사실 지금 나는 어쩌면 재취업을 겁내해야 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40대 후반의 여자가 아무 대책 없이 다시 취업 시장에 던져진 건 상당히 불안한 일일 거다, 싶지만 나뿐만 아니라 요즘엔 20대고, 30대고 이런저런 이유들과 시장 불황으로 다들 힘들다는 건 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썡쌩한 쟤들도 힘든데 너는... 어휴...'라는 눈빛이 섞인 까닭일 거다.


하지만 지금 시점의 나는 불안감이나 힘겨움,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낄 여력도 없다. 즉, 생각을 지난 한 달간 너무 당겨 쓴 탓인지 아-무 생각이 없고, 일단 자발적 퇴사가 아니다 보니 보상금과 마지막까지 악악 거리며 일한 대가로 받은 급여, 연차 수당 그리고 실업급여까지 있다 보니까 당장 헉, 하고 목덜미에 스며든 칼날을 느끼지도 못한다. 일단 내가 미친 짓처럼 탈탈 털어 몇 달 여행 다니고 놀 거 아닌 다음에야... 당장의 생활 패턴에는 큰 영향을 줄 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의 퇴사와는 상관없이 아침부터 맑은 애기들 덕분에 늦잠은 무슨.... 지금도 숨바꼭질 좋아하는 막내가 주구줄창 불러대느라 이 좁은 집안을 뒤꽁무니 쫓아다니기 바쁘다.


다 숨었다.. 데헷데헷


그냥 지금 상태는 생각도 모두 다 소진했고 그 안에는 걱정과 불안, 힘겨움도 다 포함되어 있는 건지 그런 생각도 없이 일단은 머리를 그냥 멈춰두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 돌아 생각해 보면, 이런 버거움이나 이런 풍파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것만 새삼 크지 않다는 게 이유일 테지.


오늘은 실업급여 온라인 교육 동영상을 보고 있고 의료보험 지역 가입자가 나은지, 임의 가입자가 나은지 건강보험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된다. 내일은 구직신청을 올리고 금요일 즈음 고용센터에 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전 C레벨과 만날 약속을 정한 날이 되어 만날 거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나도 또다시 사회에서 살아나갈 거다. 어쩌면 요즘 아이들의 컨디션이 좀 떨어져 있는 상태라서 이 기간에 잠시 쉬어가는 게 내 마음에도 나을 수 있겠구나, 또 뒤늦게 깨닫는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순리대로'라는 말을 계속 곱씹어 보고 있다. 순리대로...

잘은 모르겠지만 지난 한 달간의 경험이 내 삶에 있어서 나쁜 경험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냥 머리 박고 근무만 할 줄 알았지,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것들 대비 많은 것들을 배우고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꼭 나쁜 경험만으로 치부하기엔 나의 한 달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길 것 같다.


회사를 나오는 순간까지 다른 부서에서 내가 필요하다며 다시 돌아오기를 청했다. 진짜인지, 아닌지 혹은 그때 시기에 가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계획대로 될 일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지금 이 시간에 다시 한번 충실하고 있다 보면,


그러니까 하늘을 보고 걷기 어려우면 땅을 보고, 발 끝을 보고 한 걸음씩 걷다 보면 결국 끝에 다다르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을 스스로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시점 내 결론이다.


조급하지 않게, 순리대로, 천천히, 하지만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걷고,

넘어졌으니 벌떡! 일어나려 들지 말고 천천히 일어나서 천천히 살피고 다시 가는 것.


그게 지금 내가 이 일기의 마지막 장에 쓰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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