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통보 서른 번째 날
와... 시간이 오히려 정말 안 간다...!! 깜짝 놀랄 정도로 안 간다.
그 와중 회사 내부적으로는 다음 달에도 여러 부서와 여러 사람들이 재 편성될 것이라는 예상들을 내놓으며 불안감이라는 공명을 계속 가지고 가는 듯하다. 벌써 나 말고도 퇴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둘이나 나왔으니. 아니구나, 셋이구나...
W 차장이 준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어떤 동료는 나가지 말고, 차라리 일주일 정도 휴가 갔다가 그냥 바로 합류하는 게 낫지 않겠냐 하는데,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무언가를 차분히 생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사람들은 작은 파동에 파동을 더해 커다란 회오리에 휩싸인 듯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여, 만약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내 대답은 NO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 생각은 변함없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애들 성화에 눈도 못 뜨고 간식을 먹인다. 휘적휘적 화장실로 가서 일단 잠을 깨려고 칫솔을 입에 물고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나와서 얼음과 더치만 가득 넣은 얼음컵을 만들어 쥔 채 차 키를 들고 길을 나선다.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이야기들로 보내고 나면 퇴근. 퇴근해서 집에 와서는 막내를 안아 들고 부비적 부비적. 아침 간식 그릇을 치우고 저녁 간식 그릇을 내어주고. 다 먹는 사이 바닥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위로 올리고 다 먹고 나면 설거지 통에 직행. 진공청소기 한 번. 스팀이 되는 진공청소기 한 번. 그다음 차례대로 내리면 아이들은 도망갔던 침대 위에서 내려와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설거지 하고 물그릇, 밥그릇 챙겨두고. 청소기 오물통을 꺼내 세척하고 창문에 차곡차곡 쌓아 말리면서 애들 화장실까지 치우고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나면 드디어 내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 저녁을 먹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사온 수박을 잘라 냉장고에 넣고 마들렌 반죽까지 마무리를 한다.
그러고 나니 이 시간이다. 그게 보통의 나의 날들이다. 그러니까 어찌 되었든,
시간은 흐른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에서 트루먼은 일단 그냥 배를 한 척 가지고 바다로 나아간다. 물 공포증이 있음에도 불구, 일단 그는 배를 타고 나아간다.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그는 육지에서 발을 떼어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뭐가 있긴.... 엄청난 폭풍우가 그를 덮친다. 휘젓고 흔들고 부수고 적신다. 바다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그 작은 배를 움켜쥐고 올라선다. 폭풍우가 결국 멎고 나면 뭔가 바로 짜잔! 하고 보이나. 아니다. 또 한-참을 그냥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간다. 내가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하지만 되돌리기도 어렵겠다 싶은 그때,
뱃머리가 우두두둑- 우둑우둑- 소리를 내면서 벽에 꽃힌다. .... 어?
오히려 폭풍우보다 당황스러운 상황. 그는 뱃머리로 가서 확인한다. 아, 벽이다. 벽이구나.
그리고 너무도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는 트루먼.
요즘의 나는 영화의 그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마지막 날이 왔다. 그 마지막 날이 콩- 하고 마지막에 가서 부딪혔다. 드디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문에 다다른 것이다.
내일은 우리 첫째 아들의 두 번째 기일이다. 작년에는 아이 유골함을 들고 집 근처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꽃이 만발한 정원 카페에서 한참을 하늘과 흐르는 강, 일렁이는 풀들을 함께 바라보았다. 올해는 그 날짜에 맞추진 못하지 싶다. 어쨌든 연차를 쓰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다음 날 나는 회사를 나올 텐데.
내일만 정상근무하고 나면 아마도 금요일은 오전에 정리하고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다시 새로운 시작에 도전하겠지.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정말로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