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엔 조금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이야기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9월 중순, 늦은 새벽이었다. 그때 나는 전날 찍었던 사진들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때였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목 주변이 경직되고 뻐근해지는 게 느껴졌다. 잠깐의 휴식과 시원한 물 한 잔이 간절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오른손으로 물병을 움켜쥐고 목구멍으로 투명하고 차가운 액체를 10초 만에 밀어 넣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순간 '피사체'(사진 전문서점) 생각이 났다. 왜 하필 그때 서점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스파크처럼 튀어 오른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더 이상 사진 작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한차례 손봤던(다음 책에 실으려고 브런치에 올렸던 글을 따로 손봐두었었다) 글을 다시 끄집어냈다. 한참을 읽어 가는데 그때 대화를 나누던 4명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날 오갔던 대화는 내게 강렬함만 남긴 게 아니었다. 사진가로서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단 걸 알게 되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거기엔 당시 대화를 나눈 '손님' 한 명이었던 E와 감사함을 주고받은 메시지가 아직 남아있었다. E와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사진가로서 다음 챕터를 시작한 내가 조금 더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카페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단 활자를 메시지창에 채웠다. 발송 버튼을 누르려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느닷없는 메시지에 E가 곤란해하진 않을지, 부담스러워하진 않을지 염려됐다. 그렇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뒷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발송 버튼을 눌러 버렸다. 막상 그러고 나자 오히려 걱정되는 마음은 사라졌다.
다음 날, 점심시간이 넘어가도록 E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직 읽지 않은 것으로 보였고 아마도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며 나는 나대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늦은 밤 그에게 연락이 왔다. E의 답장은 답을 기다렸을 나를 배려하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도 그날의 대화가 향수처럼 떠오른다며 기회가 되면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연락을 주었던 한 주는 일 때문에 바쁜 일정이 몰려있어 다음 주에 봤으면 한다는 말로 메시지는 끝나있었다. 이후 며칠간 두어 번의 간략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성수동(팝업으로 달아오른 곳이 아니라 숨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조용한 성수동)의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게 지난 수요일이었다.
E와 만나기 전날, 나는 책장에서 사진 산문집 한 권을 꺼냈다.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 교수의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지난겨울 '이라선'이라는 사진 전문서점에서 구매했던 것인데 비닐을 벗기지도 않은 채 서재에 두었었다. 당시 책장 빈 곳에 이 책을 밀어 넣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언제일지, 누구일지 알 수 없지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 다시 꺼내자'라고. 그리고 드디어 그 책을 꺼낼 시간이 되었던 거였다.
다음 날 오후가 되자 전날 꺼내 두었던, E에게 선물할 책 한 권과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며 읽을 하루키의 에세이 한 권과 카메라 한 대를 가방에 밀어 넣고 집을 나섰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강한 비가 올 거란 예보가 있긴 했지만 집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빗줄기가 억세지 않아 안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불과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성수동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무거워졌다. 하늘이 화가 나서 비를 잔뜩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공영주차장이 하필 만차여서 줄을 섰다. 어쩔 수 없이 차 안에서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러다 한 번씩(몇 분마 다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간헐적으로) 앞에 차가 움직였고 나도 따라서 조금씩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운전석 창문 너머로 바쁘게 카페를 드나드는 사람들과 그 안에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번갈아 봤다. 목에 두른 사원증 카드나 복장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모두 근처 업무 지구에서 일하는 직장인 같아 보였다. 하지만 우산으로도 막을 수 없는 비를 뚫고 어디론가 바쁘게 돌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인 시간에도 한가롭게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시간에 카페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영업직이거나 점심시간이 30분 늦거나,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급 혹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념이 길어질 때쯤 앞 차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후. 나도 주차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성수동 공영주차장 앞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났을 때쯤이었다.
약속 시간까지 30분이 남아있었다. 따뜻한 라떼를 한 잔 주문한 후 차에서 읽던 하루키의 에세이를 마저 읽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읽을수록 신기한 면이 있다. 대체로 평이한 단어를 나열하는데도 문장으로 읽으면 섬세하단 거다. 그의 문장은 더함과 덜함이 없고 대단히 드러냄이 없음에도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언제쯤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쯤 시계를 봤다.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 되었는데 E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혹시 그도 나처럼 공영주차장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게 아닐까 싶어 밖을 쳐다봤다. 그때 카페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E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밖으로 마중 나갔다.(나는 1층 창가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그와 만나는 데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E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오는 길이 너무 멀지 않았는지, 혹시 주차장 때문에 애먹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E는 공영주차장이 만차라 근처 어딘가 민영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다행인 건 E가 도착할 때쯤엔 빗줄기가 조금은 온순해졌다는 거였다. E가 마실 커피 한잔과 휘낭시에 두 개를 주문한 후 우리는 내가 앉아 있던 창가에 함께 앉았다. 다행히 그는 그 자리를 좋아하는 눈치였다.(실제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으나 낯빛을 보아도 그랬다)
아이스브레이킹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우선 초대(?)에 응해 준 E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고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커피와 디저트가 나오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사실 그날 나눈 얘기는 지면에 옮기기엔 조금 조심스러운 것이다.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이 단순히 내밀한 것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갖게 된 경험과 아픔과 기쁨과 사랑과 철학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것을 내 멋대로 함부로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E와 나눴던 대화는 생략하려 한다. 다만, 그때 느꼈던 나의 소회 정도는 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E를 왜 다시 만나고 싶었던 건지 그와 대면하자 정확히 알게 되었다. 피사체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하는 말들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 이유도 나와 비슷한 면모가 상당 부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걸 알지 못했지만 수요일에 만나 이야기하며 알게 됐다. 비슷하다는 것의 크기는 우주만큼 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마다 취하는 행동과 생각이 너무도 다양한 현실을 돌이켜 보자면 이 정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분명 그것보단 훨씬 작은 범위에서 동작하는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가 피사체에서 건넨 말 한마디가 나를 여기까지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는 내게 정중히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작업하는 사진을 볼 수 있을까요?"
난, 그의 물음에 당황했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에 파문을 일게 했고 그것이 번지자 한편에 애써 밀어두었던 걸 결국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E를 다시 만나고 싶었던 건 그것이 무엇이었길래 나를 움직이게 했는지, 그리고 사진가로서 다음 챕터를 시작한 내가 E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말하고 싶어서였다.
두 사진가의 대화는 3시간 반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