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바버샵에만 다녀오면 오후엔 일정이 없었다. 어디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데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심과 잠시 떨어져 있고 싶어 절에 다녀올까 하다가 지난달에 다녀온 게 생각났다. 매달 절에 가는 건 나이롱 불자 다운 행보가 아니었다. 아무튼 절에 가고 싶지 않아졌다. 바쁜 속세와 잠시 떨어질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하며 지도 앱을 열었다. 버스로 25분 거리에 있는 궁궐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3분 후면 그곳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운명처럼 272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느덧 율곡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율곡 터널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터널이었다. 다음엔 저기를 한 번 걸어봐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버스는 어느새 궁궐 앞 정류장에 나를 내려놓았다. 땅에 발을 디디자 배고 고파왔다. 참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근처 식당에서 보쌈 정식으로 배를 채웠다. 궁궐로 발길을 옮겼다. 매표소 앞은 키오스크가 점령하고 있었다. 궁궐과 키오스크라... 확실히 어색했다. 하지만 이런 이질감이야 말로 IT 선진국다운 행보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IT 선진국인데 보안은 엉망진창이라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키오스크에서 성인 1명을 선택한 후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런 후 카드를 넣으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카드 투입구엔 금색으로 된 무언가가 이미 꽂혀 있던 거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취소 버튼을 찾는데 IT 선진국에서 만든 키오스크는 역시, 대단히, 무척이나 민첩했다. 순식간에 입장권이 출력됐다. 카드를 빼서 매표소 쪽으로(엄연히 인간이 근무하고 있는) 가져다주려다가 문뜩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어떤 사건에 휘말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 왔다. 결국 카드와 입장권은 키오스크에 그대로 둔 채 매표소로 가서 '인간'을 찾았다. 상황을 설명하니 담당자가 직접 밖으로 나와 민첩한 키오스크에 꽂혀 있던 카드를 수거했고 입장권은 취소 처리 해주겠다고 했다. 누구의 카드인지 모르겠지만 잘 해결된 것 같아 안심이란 생각과 어떤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아 다행이란 마음이 공존했다.
약간의 에피소드를 겪은 후 궁궐로 향해 걸어갔다. 순간 알았다. '아... 잘못된 선택이다.' 그랬다. 오후를 고즈넉하게 궁궐에서 보내고 싶던 나의 소박한 희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게 되는데 몇 발짝이면 충분했다. 우리나라가 문화 강국이 되었다는 걸 궁궐에서조차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곳을 채운 건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었다. 간혹 우리나라 사람이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외국인이었다. 조용한 모습의 궁궐을 담고 싶던 계획도 당연히 실패였다. 파인더에서 사람이 없는 순간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있다고 해도 아무런 볼 것 없는 어디 구석 정도랄까...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스페인어가 많이 들렸다) 웃음을 지으며 타국의 궁궐을 관람하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올라오는 건 애국자로 된 것 같은 묘한 감정이었다.
계획에서 많이 어긋난 오후를 보냈지만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이야깃거리가 생겨나는 것 같다. 오늘은 그날에 담았던(최대한 '인간'을 피하려고 했던) 사진으로 이번 주의 행복 조각을 마무리한다.
창덕궁에서...
모두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시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