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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행복조각

by 윤기





월요일과 어제, 나는 비를 맞으며 한강을 달렸다. 여전히 발목 부상은 회복이 더디지만 우중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을 참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긴 연휴를 맞아 끝을 모르고 즐긴 청구서가 묵직한 체지방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비가 온다고 해서 방구석을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달렸다. 체지방을 태우기 위해서 살이 찌는 걸 막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나의 체지방 태우기 프로젝트는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몸이라 생각하며 살았던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체중이 늘어나 버렸고(그렇지만 입던 옷의 사이즈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느끼기엔 살이 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 몸에 익숙해졌던 10년 전 어느 날이었다.


이틀째 속이 좋지 않아 회사 근처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체한 것 같다며 약을 지어줬다. 오한과 함께 잠에서 깬 건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마치 군 시절 철원에서 혹한기 훈련을 뛰었을 때처럼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몸이 떨리는 것도 모자라 턱까지 덜덜거리며 이가 자꾸 부딪치는데 멈추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단 생각이 들었다. 복부 어딘가에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어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 바닥을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신음에 깼는지 왜 그러고 있느냐며 아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침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119에 연락하려다가 아내가 모는 차를 타고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젊은 의사가 내 배를 여기저기 눌러보더니 좋지 않은 것 같다며 급하게 채혈과 CT를 찍게 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은 더 커졌다. 창피함이고 뭐고 거의 울부짖는 것에 가까운 신음을 토해냈다. 어떻게 좀 해달라며 애원하자 의사는 가장 센 진통제를 처방할 텐데 만약에 이게 듣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니까 참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얼마 후 간호사가 자그마한 병을 가지고 나타나 링거에 연결했다. 다행히 진통제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침대 위에 어정쩡하게 앉아 다시 시작되는 통증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젊은 의사가 다시 나타났다. 결과가 나왔는데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된 것으로 보이며 수술을 집도할 교수님이 한 시간 후면 오니까 조금만 참아보자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어 자세히 둘러보진 못했지만 그곳은 새벽 시간의 응급실이었으니까 아마도 나보다 더 위급한 환자를 돌보러 떠났을 거였다. 그렇게 난 배를 움켜쥐고 수술 시간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1분이 한 시간 같았다.


"환자분! 환자분! 일어나세요!"

"수술 끝났어요. 눈 떠보세요. 환자분!"


한겨울 바닷가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나는 맨몸으로 매서운 바닷바람과 싸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날 급하게 깨웠다. 간호사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술방에 들어가 이름을 말했던 것 같은데 간호사는 수술이 끝났다고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천장의 패턴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병실로 이동 중인 것 같았다. 병실에 들어가자 간호사는 내 왼팔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의사 선생님이 언제 오실 거며 어떤 상태인지 설명해 줄 거란 말과 몸무게를 수시로 재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옆구리에 달린 호스는 절대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지만 옆구리에 달린 게 뭔지 궁금했다. 고개를 겨우 들어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뱃속으로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스와 투명하고 작은 통이 옆구리에 달려있었다. 그걸 보고 너무 놀라(이런 게 달릴 거란 이야기는 수술 전에 듣지 못했으니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물어봤다. 간호사는 교수님께서 설명해 줄 거란 말과 함께 다급히 사라졌다. 다행히 수술했던 교수가 금방 도착했고 여전히 멍하게 누워 있던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환자분 괜찮죠? 아니, 아프면 병원에 와야지 미련하게 그렇게 참으면 어떡해요? 복막염이 얼마나 심했는지 1시간이면 끝날 수술이 세 시간이나 걸렸어요.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장기 이곳저곳에 염증이 다 퍼져 있어서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어요." 그의 말투는 걱정과 답답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업무의 시선으로만 보더라도 그럴 텐데 생명을 다루어야 하는 일이었으니 아무리 경험 많은 베테랑 의사라도 그 정도 감정은 토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놀랐던 건 어떻게 맹장이 터진 채로 3일이나 보낼 수 있는가였다. 평소 나는 그다지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3일간 통증을 버텨냈다니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일인지 실로 놀라웠다. 그 시간을 보낸 게 내가 맞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만약 내가 어디 몽골 사막이나 아마존의 밀림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지금 온전하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살아있다는 것의 감사함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그것과 동시에 3일 전 체한 것으로 진단했던 회사 근처의 내과 의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회복의 시간에 접어들었다. 다음 날 아침 회진 때였다. 교수가 하얀 가운을 입은 무리를 이끌고 내게 왔다. 그가 내게 다가와 옆구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자 멀리서 보이던 희끗한 머리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교수의 머리카락은 수많은 수술과 싸워내느라 허옇게 된 것일지도 모르고 얼굴에 푹 페인 주름만큼이나 나이가 들어 그렇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염증이 흘러나와 담긴 작은 통을 지긋이 본 교수는 아직도 심하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속삭이듯 작은 소리에 뒤에 있던 의사들이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보였다. 교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혼내듯 내게 말을 걸었다. (전날의 엄숙한 분위기와 달리 약간의 농담조였다) 다음부터는 아프면 병원에 오라고. 이번엔 확실히 걱정이 앞선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교수는 예상 퇴원일을 알려줬다. 보편적인 맹장 수술이었으면 이틀 후에 퇴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최소 일주일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힘들어도 자주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빨리 나아서 뭐라도 먹을 수 있다고. 그랬다. 나는 수술 후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수액에만 의존해 영양을 공급받고 있었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며 나는 세 가지 관점에서 변화를 겪었다. 우선 의사였다. 평소엔 의사라면 뭔가 거리감이 있는 존재였다.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사실 그들의 존재를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나자 생명을 다루는 고귀한 존재로 다가왔다. 눈앞의 죽음을 아주 조금 뒤로 무를 수 있는 존재.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감사함이 밀려왔다. 어쨌든 감정에 과몰입하지 않더라도 며칠 전 응급실에서 느꼈던 통증이 사라진 것만으로 나는 의사란 존재에게 감사했다. 다음은 간호사였다. 간호사라는 존재 역시 의사와 다름없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혹은 의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막상 그들을 곁에서 보니 무지한 생각이란 걸 알게 됐다. 그동안 간호사를 만난 건 동네 병원이 전부였다. 그런 곳에선 그저 접수할 때와 처방전을 받을 때 또는 주사를 맞을 때만 마주하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수술 후 병동에서 간호사를 만나며 알게 됐다. 그들은 24시간 내내 3교대로 돌며 매시간마다 체온을 점검하고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물어봐 주고 새벽엔 잠든 사람을 깨우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몸무게 체크를 부추겼다. 그나마 나는 순순히 응했지만 2시 방향에 있던 같은 병실의 아저씨는 매번 신경질을 부렸다. (이 아저씨는 제법 험상 굿게 생겼는데 나에게는 항상 친절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간호사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병실에서 이런 일들을 겪고 나자 나는 그들이 천사가 아닐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사명감 없이 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절대'란 말은 지양하는 편인데 그들에겐 아낌없이 사용해도 된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어디에서 누구에게 최고의 친절을 받았느냐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내가 입원했던 병실을 지키주던 간호사였다고.


마지막은 만 3일이 지나 거울 속에 나타난 어떤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건 나였다. 복막염 수술 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수액만 맞으며 4일을 보낸 나였다. 이때 체중은 병실에 들어왔을 때 보다 8kg이 빠진 상태였다. 그때 알게 됐다. 왜 주변 사람들이 나보고 얼굴 좋아 보인다고 했는지. 그들이 말한 건 그냥 돌려서 이야기한 거였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입던 옷의 사이즈가 달라지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단 것도 알게 됐다. 나는 '절대'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고 확신한 탓에 무려 8kg이나 체중이 늘었는데도 인지하지 못했던 거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게 가능한 것인지 믿을 수 없지만 아마도 나는 '나'를 가스라이팅 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것 말고는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수척했을 텐데도 살이 빠지니까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다. 그때 결심했다. 다시는 내 몸에 지방이 쌓이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다고. 입원한 지 12일째가 되어 퇴원하자마자 한강을 매일 걸었다. 한여름의 한강은 뜨거웠다. 수술을 위해 절개한 세 곳의 통증도 여전했다. 하지만 그냥 참고 걸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자 통증이 가라앉았다. 이제 문제는 체지방 관리였다. 고민하다 집 근처 문화센터에 있는 곳에서 아내와 함께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 나는 물을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했다. 어릴 때 바다에 빠져서(발이 닿는 곳이었지만 그때는 패닉 상태라 몰랐다) 허우적댄 기억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부러워했다. 아내와 나의 성장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병아리 반에서 숨쉬기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팔 돌리기를 하고 자유형을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수영을 한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둘 다 금방 초급반으로 올라갔고 거기서도 꽤 괜찮은 성장 속도를 보였다. 매주 3회 아침마다 수영을 다니면서 6개월 차가 되자 중상급 반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운동량이 꽤 있어서 아무리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았다. 주말마다 축구를 병행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함께 수영을 다닌 아내도 체지방이 꽤 빠지면서 슬림해졌었다. 분명 체지방 관리에 큰 효과가 있었다. 수영을 열심히 다닌 사람들은 알 거다. 물에서 땀이 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렇게 열심히 5년 정도 수영을 다녔고 아내와 나는 어느새 상급반에 고인 물이 되어 있었다. 아직 교정해야 할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모든 영법을 할 수 있었고 발이 닿지 않는 바닷가에서도 구명조끼 없이 수영할 수 있었다. 상급반에 올라갔을 때였는데 한 때는 과욕을 부린 탓에 회전근개가 미세 파열돼서 4개월 정도 쉬기도 했다. 그때마다 러닝을 조금씩 했었다. 유산소를 하지 않으면 식단으로만 체중 조절을 해야 했는데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체중 조절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유산소 없이 식단으로만 해결하려니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는 잠시 러닝으로 유산소 운동량을 채웠다. 어깨가 낫자 다시 수영장으로 복귀해서 상급반 회원들과 함께 한강 대회에도 출전했다.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나와 함께 했던 한강을 건너다니... 예전에 한강에 앉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혹시 내가 아무리 수영을 잘하게 되더라도 저기를 건너는 건 무리겠지?' 그랬던 내가 몇 번이나 한강을 건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였다. 그것도 왕복으로 몇 번이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대회를 나가 아내와 함께 완주 메달을 받게 되다니... 말할 수 없는 행복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수영은 단순히 체중을 조절해 주는 수단이 아니었다. 물살을 가르며 그 안에서 자유를 알려준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다 5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코로나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였다. 정부는 국민의 집합을 통제했고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는 아무런 합의 없이 폐쇄해 버렸다. 마스크도 쓸 수 없는 수영장이 1순위가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충격이었다. 이제 인생에서 너무도 중요한 행복이 되어버린 수영을 할 수 없는 건 내게 폭력이었다. 하지만 법으로 강제하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한강을 달렸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이 달렸다. 20분을 달리는 것도 힘들어하던 내가 한 시간을 넘고 두 시간을 달리게 되자 새로운 행복이 찾아왔다. 한강을 수영으로 건너는 것과 한강을 옆에 두고 달리는 건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금방 지나갈 것 같던 코로나는 몇 년 동안이나 사회를 마비시켰고 수영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시간만큼 달리기와 친해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강을 달렸고 태양이 물들이는 한강을 보며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기도 했었다. 시간이 흘러 수영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물론 자유 수영으로 가끔씩 수영을 하긴 했지만 이전처럼 정규 강습은 신청하지 않았다. 러닝이 주는 행복에 익숙해진 탓이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장소와 시간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에 더 큰 매력을 느낀 거였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과 부상 이력을 생각하면 수영을 첫 번째 유산소 운동으로 선택하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최대한 러닝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려 한다.


거의 8개월이 다 되어가도록 낫지 않는 부상 때문에 고민이 많던 요즘이었다. 러닝을 인제 그만두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단 몇 달이라도 쉬어야 하는 건지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주 두 번이나 비를 맞으며 달리면서 수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와 본격적으로 러닝을 하려고 했던 순간의 감정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10년 전, 갑자기 터져버린 맹장이 나를 수영장으로 이끌었고 쓰나미처럼 밀려온 전염병이 나를 달리게 했다. 수영과 러닝을 시작한 이유가 비록 체중과 체력 관리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심박수를 높인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운동. 그 순간이 주는 행복 때문에 물살을 가르고 한강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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