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집에만 있어서일까. 피트니스를 다녀오면 문득문득 그 잔영이 따라다닌다.
그날은 자리 지정제를 실시하기 5일 전이었다. 댄스 수업이 끝난 후 J회원과 나는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M회원이 J회원 오른편에 자리 잡더니 혼내는 말투로 말했다. GX실 댄스 자리에 관한 얘기였다.
‘M회원이 자리 지정제를 실시하자고 피트니스에 건의했다고 했었지.’
속으로 생각하며 언니들 얘기를 들었다.
‘건의한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으셨구나.’
M회원이 충동적으로 말한 건의 때문에 댄스 회원들 모두 툴툴거리고 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자리 지정제를 실시하면 첫줄 가운데 J회원 자리에서 운동하고 싶다고 분명하게 밝히시네...’
자신도 경력이 20년이라고 말하는 M회원은 다른 곳에서는 15년 간 첫 줄에서 운동했는데 여기 피트니스에서는 첫 줄이 아니어서 속상하단다. 도무지 앞으로 차고 나갈 수가 없단다. J회원은 놀라서 말문이 막혀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이지..’
나도 눈이 크게 뜨였다. 의아하여 J회원과 함께 M회원을 쳐다봤다. M회원은 매섭게 노려 보더니 J회원에게 댄스 자리에 관해 여러 무례한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 보는 M회원 모습에 놀라서 그냥 쳐다봤을 뿐인데 그 이유에서 일까. 나도 J회원과 한 묶음이 돼 버렸다. 유산소 운동을 위해 L 피트니스에서 처음 댄스를 시작한 내게도 실력을 운운했다. 댄스 20년 차라고 주장하는 M회원은 이제 2년 차인 나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초보에게도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 실력인 건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하였거늘, 아직도 실력이 늘지 않으셨나. 속이 꽉 찬 사람이 아닌가.'
M회원은 말을 끊지 않고 계속 자기자신 생각을 점점 더 크게 J회원을 향해 말했다.
‘오 마이, M회원은 마음이 없는 사람 같다. 나이가 많아도 아주 많으신 분이... 어쩜 J회원에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나.’
‘책이든 영상이든 무얼 통해서든 자신을 비추어 보면 좋을 텐데...’
옷을 입으며 들리니 어쩔 수 없이 듣고만 있는 우리에게 M회원은 눈꼬리를 더 추켜올리고 부연설명까지 점점 더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무도 없어서 이렇게 마음껏 말하시나.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게인가. 막말하던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시더니...’
“참 사람들은 왜... 예의에는 무례함을 무례함엔 예의를 차리는 걸까. 사람들은 왜... 공포를 주는 사람을 오히려 떠받들어 따르고, 따뜻하고 옳은 사람 앞에선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걸까. 반대여야 하지 않나.”
기막힌 상황에 놀라서 J회원과 나는 말문이 막혀 눈만 계속 크게 뜨고 있었다.
M회원은 60대 초반이다. 나이가 무색하구나. J회원도 나도 M회원이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무어라 대꾸도 못하고, 반격은 물론이고 그 어떤 의견도 표현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피트니스 댄스 군기다.
그 상황에 ‘정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정치 철학 교수였던 롤스가 생각났다.
‘그는 사회 제도의 제1 덕목을 정의(justice)라고 하였지.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되지 않는다고 하였지. 부정의(injustice)는 그보다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참을 수 있는 거랬지.’
M회원도 나름의 권리를 부르짖는 거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가 아니다. 자신을 분노케 한 대상에게 항변해야 한다.
어느덧 M, J 두 언니 회원은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나는 롤스에 이어 법철학자인 예링을 생각하며 머리를 더 말렸다. 예링의 책 제목을 떠올리려는 순간, 왼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어디부터 지켜봤는지 댄스 수업을 함께 듣는 동생 회원이 내 옆에 서 있었다. 그 동생 회원이 M회원을 향해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의미심장한 대규였다.)
“언니, 나도 20년 차인데 아직도 제일 뒤에서 운동해요.”
M회원보다 실력이 좋고 연차가 오래되었어도 나이가 어려서 제일 뒷줄에서 운동하고 있는 동생 회원이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의미, 어떤 의도의 일침일까.
그 말에 M회원은 조용해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댄스 자리는 L피트니스일 때도 문제이더니 J피트니스에서도 문제다.
J피트니스 댄스 수업 첫날을 기다리며 며칠 전부터 회원 언니들이 일찍 오라고 챙겨 주셨다. 항상 수업 시작 5분에서 10분 전에 도착하는 내게 그전날에도 어김없이 당부하셨다. 그래서 수업 시작 첫날은 평소보다 일찍 갔다. 머릿속으로 내가 서고 싶고 서도 될만한 자리를 생각하며 그 자리에 서보자고 결심했다. 피트니스 공사와 코로나 19로 인해 댄스 회원들 모두 5개월가량 쉬었지만, 나는 댄스 2년 차라서 작년까지 가장 뒷 줄에서 운동했다. 언니들이 이번에는 새로 시작하는 거니 두 번째 줄이나 세 번째 줄로 차고 나오라고 알려 주셨다. 아직 두 번째 줄에서 운동할 자신은 없다. 2년 차여도 결석을 많이 했고 매일 출석할 자신도 없다. 게다가 경력도 실력도 우리 피트니스 회원들 평균 경력에 비하면 두 번째 줄에 서기엔 모자라는 듯하여 세 번째 줄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댄스를 또다시 시작한 첫날부터 자리 지정제를 실시하기 전까지 고정된 자리는 1번에서부터 10번까지 그리고 14번으로 거의 고착화되고 있었다.
1,2번 회원은 20년 차 경력이고 3번 J회원은 25년 차다. 4번 H회원과 5번 W회원, 그리고 6번은 몇 년 차인지 모르고, 4번 회원은 재즈댄스 경력이 있다고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7, 8, 9번은 최소 6년 차이고 10번 회원은 몇 연차인지 모르지만 줌바댄스 경력이 많다고 들었다. 14번인 나는 2년 차다. 이렇게 나를 포함한 11명은 첫날 잡은 댄스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한 달 이상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출석률이 곧 선점한 자리 확정이기 때문이다. 거의 고정석이 된 열한 자리 외 나머지 자리는 들쑥날쑥 출석하여 자리가 매일 바뀌고 있다.
댄스 회원들은 신입이면서 1년 차인 두세 명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입 또는 기존 회원으로 5년에서 20년 차 경력이다. 20년 차인 M회원도 이들 틈에서 세 번째 줄에 섰다가 제일 뒷줄에 섰다가 하며 자기 자리 없이 방황하며 운동하고 있었다. 결석하는 바람에 그리 되었지만 그 심정이 이해는 간다. 피트니스에 민원을 넣기 전까지 내가 본 M회원 모습은 말없이 조용히 운동만 열심히 하는 나이 많은 회원이었다. 눈매는 늘 매서웠지만 나이 많은 회원답게 운동하고 계셨다. M회원의 댄스 실력은 눈에 띠지는 않았어도 순서를 잘 기억하고 하시는 듯 했다. 댄스 경력 연차는 정확히 몰라도 나보다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첫날에 자리를 못 잡고 주춤하시며 이리저리 서성이고 계실 때 다른 회원들과 내가 눈짓과 손짓으로 1번 자리와 11번 자리를 권했다. 그때는 괜찮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고선 이제 와서 뒤늦게 자리 때문에 민원을 넣으신 후, J회원과 내게 속상함을 호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공격을 하셨다. M회원은 2년 차인 내가 14번으로 고정석인 것도 불만이시고, 언니보다 경력이 많아도 J회원이 불변의 센터(3번) 자리인 것도 못마땅하신 걸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유가 있다고 하여 이렇게 일방적으로 무례한 말을 하는 걸 용납할 순 없다. 피트니스에서는 관찰자 입장으로만 지내고 싶건만...
M회원이 건의한 민원으로 자리 지정제를 실시하면서 기존의 자리를 허무는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다.
5번 회원이 3번 회원 자리에서 운동하려다 원상 복귀되었고, 아주 가끔 와서 이름을 모르는 동생 회원이 10번 자리에 서 있자 10번 회원이 비켜 달라고 서로 실랑이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1번 회원은 자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자 없는 사실을 뒤에서 말하다가 회원권을 취소했고, 2번 회원은 가끔 와서 이름 모르는 동생 회원이 자기 자리에 이름을 먼저 적어버린 걸 보고 자기 자리가 아니면 운동하기 싫다며 집으로 가버렸다. 정말이지 댄스 수업은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다. 조용하게 지나가는 날이 없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잠재울 수 없던 댄스 회원들의 좌충우돌을 코로나 19가 잠식시켰다. 코로나 19 재확산이 심각해지자, 댄스와 바디 스컬트 등 GX 프로그램 일부가 (2주간) 중단되었다.
‘조용하다!’
댄스팀이 피트니스에 나오지 않으니 GX실 앞도 카페도 탈의실도 샤워실도 모두 조용하다.
J회원이 말했다.
“댄스팀이 안 오니, 정말 조용하네. 있고 없고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네, 그렇네요. 흐흣!”
J회원과 나는 요가를 마치고 탈의실에서 편안한 웃음을 짓는다.
‘댄스팀이 없으니 정말 고요하구나!’
‘코로나 19에 태풍 바비에 모두가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감을 느끼겠구나.’
탈의실이 이렇게 조용하다니, 마치 태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 같다.
(202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