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맨작가, 가을의 과일나무를 키우고 싶다
고향에 돌아오면 늘 소나무를 만난다. 소나무는 침엽수이기에 '삐죽한 검푸른 침'으로 무장한 나무다.
태어나서부터 이 소나무를 보면서 성장하였기에, 때로는 삐죽하고 날카롭게 송곳처럼 사계절의 들쭉날쭉한 바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왔다. 상록수처럼 나의 젊은 시절은 그렇게 칼바람을 이겨내는 화살촉 같았다.
한반도의 겨울 바람은 사계절 내내 둥그런게 아니기에 활엽수들은 살아남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중북부 나무들은 소나무 전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게 된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소나무, 전나무들 침엽수들이 살아남기에 좋다. 그렇게 나의 삶은 침엽수들을 닮아서 둥그렇기 보다는 쭈삣하고 삐죽하게 성장하였다. 특히 중국대륙의 삭풍에서 16년을 견뎠다. 침엽수처럼 성장한 나는 온돌마루 아랫목 없이 따스한 실내 기운이 없는 중국 대륙에서 40대 후반까지 살아남았다.
평창동 언덕의 길을 달려보니 그 안에 활엽수들이 있었다. 어려서 그 활엽수들이 또 다른 나의 삶을 둥그렇게 하였다. 중년 이후에 활엽수들이 나의 삶을 채우게 되었다. 단풍나무처럼 낙엽처럼 둥그런 잎들처럼 삶은 때때로 옷을 갈아입고 내려놓는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게 되었다.
신갈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 고로쇠나무, 자작나무, 개서어나무, 쪽동백나무....
중년의 나의 성향은 둥그렇게 단풍나무처럼 울긋불긋하게 빛나는 낙엽이 되었다. 가을바람을 맞으면서 찬 겨울의 삭풍을 견디지 못하면 길바닥에 떨어지는 활엽수들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물들여왔다.
봄을 기다리면서 새싹을 틔우는 심정으로 변화에 적응하는 법을 활엽수들에게서 배워왔다.
인왕산이 보이는 평창동의 높은 언덕에는 활엽수와 상록수가 함께 어울어진다.
상록수는 사계절을 버티면서 다른 활엽수들과 더불어 두루 살아가게 하기에 산의 초록을 밑바탕이 된다.
단풍나무, 활엽수는 사계절에 순종하기에 단풍이 되고, 낙엽이 된다.
인생이 그렇게 둥그렇게도 날카롭게도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한가지 모양으로 언제나 한가지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고,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것임을 실천하게 되었다.
변화에 순종하지 않고 탈바꿈하면서도 본질을 지켜가면서 살아남는 나무들처럼 늙어간다.
산을 보면 울긋불긋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 초록이 바탕이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상록수와 단풍나무들이 섞여 있다.
나의 삶도 그렇게 초록이 밑바탕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그 위에 울긋불긋한 색채를 담고 싶다.
언제나 초록만 고집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마음을 지니고 싶다.
가을의 들판 칼라, 겨울의 순백의 칼라를 담으려면 황금색도 붉은 입술의 색깔도 마음에 담고 싶다.
억새풀처럼 쓰러지지 않고 간다면서 다시 일어설 겁니다.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겁니다. 2000일을 날마다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억새풀같은 인생임을 증명할 겁니다. 글을 쓰는 것도 결국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2026년 소설 단행본 집필을 완료하겠습니다. 스스로 다짐하고 날마다 실천하겠습니다. #호프맨작가감성인문학 #스니커즈는어떻게세상을정복했을까 #호프맨작가 나는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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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초록이 뒤덮혀 있은 언덕을 내려오면서 아침 햇살이 반짝인다.
언덕 아래 마지막 시선으로 산빛을 보니 울긋불긋한 것이 겨울이 임박하였음을 받아드린다.
우리의 중년처럼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나무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드린다.
단풍나무가 될 수 있다면 겨울을 버티면서 봄에 다시 새순의 초록물이 반짝이는 희망을 갖고 살게 된다.
초록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록수가 노력한만큼 젊은 시절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중년의 삶, 우리의 삶은 단풍나무들의 핏물을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비록 가을은 지나가지만, 우리의 삶은 울긋불긋한 가을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가을의 나무들이 과실을 맺듯, 우리의 삶에 열매가 영글어가기를 바란다.
살아가면서 변화에 적응하는 부단한 노력의 과일이 열리기를 바란다.
겨울을 나는 나의 마음에 과일나무를 성장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