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무모하게, 많은 계획없이, 잘 다니고 있었지만 징글징글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에 유학을 왔고, 다시 하기 싫던 공부를 2년이나 하고, 파란만장한 시간을 지나 런던에 있는 세 번째 회사에 정착했다.
01. Third Seat
수습변호사로 영국 변호사 협회에 등록한 후, 2년의 트레이닝 기간 동안 각 6개월씩 다른 분야를 거쳐 정식 변호사로 등록이 된다. 회사 사람들 말처럼 생각 없이 하루씩 버티다 보니 2년 기한의 수습계약기간 중 4분의 3이 지나갔다. 늙어서 박사 마치고 포닥(박사후과정)하는 친구 말마따나 우리 나이에는 그냥 잘 버티는 것일 뿐, 별다른 대안이 없다. 혹시라도 요행히 별다른 답이 있으면 당장 그 길로 따라가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것. 그게 수습변호사의 2년이다.
수습기간 세 번째 분야(third seat)는 clinical negligence litigation/healthcare.그래도 경험치가 쌓여서, 그리고 큰 액수의 기업 케이스소송과 고등법원 소송건만 할 때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웃음도. 점심시간의 식욕도 돌아왔다.
점점 더 바빠졌지만 그래도 조금씩 진화하는 것인가. 담당하는 케이스가 191개가 되면서 내가 관리하는 패러리걸이 네 명 생겼고, commercial/civil litigation, bankruptcy, professional negligence, clinical negligence litigation과 기업고객 자문건들이 여기저기서 밀려오는데 아기 변호사 주제에 믿음직스러워 보이려고 과잉 충성을 하고 있다.
내 밑에 패러리걸 네 명이 붙는 바람에 고객 유치 및 돈을 벌어오는 업계 말로 "billing"의 부담이 생긴 것도 덤이다.매주 금요일마다 내 팀이 한주동안 얼마를 벌어왔는지 회계팀이 집계하고 실적을 보고한다. 보통 급여의 3-4배에서 6배정도를 로펌에서는 벌어오라고들 한다고 한다. High value case들은 내가 직접 하고 나머지는 밑에 뿌리고 봐주고 있는데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에 3-40분 쉬는 걸 빼고는 소처럼 일하고 있다. 이메일 인박스에 확인해야 할 것들이 하루에 250-500개쯤 된다.
소송을하다 보니 늘 데드라인이 내일인 것 같은 강박관념과 친구가 되었고, Headspace니 Calm이니 하는 명상 앱을 두 개 깔았고, 아침마다 최근 판례를 하나씩 읽고 파트너들에게 요약해서 whatsapp으로 보내면서 출근하게 되었고, 세상 못되게 레터와 이메일을 쓸 줄 알게 되었고, 상대 변호사가 "nonsense! "같은 감정적인 답을 해도 그냥 프린트 스크린을 해서 SRA (Solicitors Regulation Authority, 영국 변호사협회)에 상대방을 참조로 넣고 이메일을 날려 간단히 신고하게 되었고, 기분 나쁜 소리를 하면 Defamation Pre-Action Protocol notice (명예훼손에 관한 내용증명, 정도 되겠다)를 스윽 휘갈겨 써서 협박도 하게 되었다. 상대 변호사가 제시간에 뭘 못하면 wasted cost를 청구하겠다고 협박하고 돈을 받아내게 되었고, 능력 없는 barrister(법정 변호사)에게는 교양 있게 서면으로 모두 참조로 넣고 그쪽 회사에 컴플레인하고도 웃으며 전화하는 뻔뻔함도 장착했다. 참 못된걸 빨리 배웠네.
때로는 이런 소동이 재밌고, 때로는 할말 잘 못하는 나의 우유부단한 천성과 상반되는 공격적인 제 2의 자아의 뾰족한 됨됨이가 놀랍고, 또 때로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잠시 우쭐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나의 행복이랑 무슨 상관인지, 사람들이, 혹은 내가, 너무 직업에 큰 의미를 두는 게 아닌지, 자아실현과 직업이 꼭 하나여야 하는지, 아직도 가끔은 방황하는 삼십 대 어른의 고민에는 와인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02. Practical Skills Course
일만 한다고 수습기간이 끝나는 게 아니다. 회사마다 요건이 상이한 경우가 있지만, 법정 변론도 몇번 가야하고, 클래스도 들어야하고, 법이나 유명한 판결 정리 브리핑 과제도 있고, 변호사협회에서 정한 코스와 시험도 쳐야하고, 주별 월별 리뷰 미팅과 최종 인터뷰도 있다. 지난달에는 수습변호사가 해야 하는 advocacy(법정 변론) 횟수를 채우려고 County court 에서 첫 변론을 했는데 이겨서 칭찬을 들었다.
끝이 아니다. PSC(Practical Skills Course)는 trainee solicitor는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2-3주 정도의 교양 및 필수 과목이고 회사에서 수업 및 교통비를 부담해야 한다. 임용날짜를 네달 앞두고 트레이닝에 필요한 PSC 시간을 채우려고 과정을 골랐다. 나는 Kaplan에서 패키지 코스를 등록했고, 회사가 £1,500+ 정도의 비용을 부담하고, 시간표랑 과목을 supervising partner랑 정했다. 런던 시내의 호텔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해서 시간표를 두 달에 걸쳐 띄엄띄엄 짰는데도 일에는 부담이 있어 전화와 메시지에 시달렸다.
Core
Client Care - 1 day
Professional Standards - 1 day
Financial and Business Skills - 3 days
Advocacy and Communication Skills - 3 days
Electives
Commercial Contract Drafting Skills - 1 day
Intellectual Property: Essential Skills - 1 day
많이들 부담을 갖는 수업은 Advocacy와 Finance and Business Skills (“FBS”). Advocacy는 3일에 걸쳐서 2개의 민사/형사 모의 재판을 준비해서 각자 배정받은 1-2개의 역할로 참여하고 두 명의 채점관에게 채점받는다. Pass/fail이라 대단히 심각하게 못하거나 태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거의 통과하고, 강사의 말로는 자기가 가르치는 동안 fail 한 애들은 3명 있었는데 런던에서는 ‘당연히’ - 강사의 말로는 - 없었고 런던 밖 도시들 수업에서 탈락자가 나왔다고 했다. 아무래도 런던은 영국 타 지역보다 변호사 수임 요율이 법적으로 더 높게 책정되어 있느니만큼, 좀 경쟁력 있는 변호사가 많이 집중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첫날 형사재판에서는 opening statement를 맡았고, 둘째날 민사 재판에서는 증인 심문을 했는데, 이미 수업을 들을 시점에도 두 번이나 법원에 가서 더 심각하게 실전으로 변론을 하고 왔는데도 그렇게 편한 마음이 되지는 않더라.
FBS는 이틀 빡세게 공부하고 오픈북 시험을 본다. 두 가지 색깔 형광펜과 중요한 페이지 표시용 탭 필수. 90분 동안 객관식 문제 15개 (30점) 그리고 case study 2가지 (각각 8-9개의 서술형 문제가 포함)를 끝내야 한다. 강사는 우리들한테 숨도 쉬지 말고 물 마실 생각도 하지 말고 시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쓸 수 있는 만큼 쓰고 나가라고 이틀 동안 몇 번이나 말했고, 나는 들은 대로 그렇게 했고, 그날 불꽃튀기는 시험 후에는 역시나 오른팔을 쓸 수 없었다. FBS는 진빠지는 시험을 치고도, 오후 수업까지 다 듣고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수료. 다른 수업들은 항상 발표시키고 꽤 긴 숙제를 내주는 거 말고는 그럭저럭 할 만하다. 난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선택과목 중 하나인 commercial contracts drafting skills를 온라인 코스로 들었는데, 온라인으로도 그룹 과제를 다 시키고 한 명 한 명 카메라로 발표를 시켜서 똑같이 피곤했다.
런던에도 나에게도 이 아름다운 계절이 왔다.
수업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지만 사람을 쥐어짜는 수업인 것은 확실하다. 오랫동안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이제 꽤 질렸거니와, 일도 애들한테 시키고 왔지만 수업 내내 폰으로 오는 연락이 끝이 없었다. 특히 나는 그즈음에 부모님이 한국에서 몇 달 일정으로 런던에 오셨는데, 주말을 끼고 스위스 여행을 계획해놓은 바람에 호텔, 관광기차, 비행기에서 공부를 하고 월요일 아침에 London City 공항에서 바로 켄싱턴에 위치한 시험장에 가는 힘이 쭉 빠지는 일정을 짜서 좀 힘들었다. 시험이 끝나니 엄청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마지막 계단 하나 남은 느낌!
고생스러운 과정은 거의 다 끝났고, 시험 결과는 종료 28일 후 연락이 온다. 남이 하면 간단해보일 때가 많지만 직접 해보면 쉬운 것이 없다. 우리 회사 새 트레이니들은 하루하루 트레이닝 일지에 day 1, day 2 하는 식으로 날짜를 세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데, 꼭 나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나의 그 시절이 아마득하다. 결국에는 런던이 아름다운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