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으로 살면서 회사원 때려치우고 도망갈 로망 하나는 항상 품고 살았다.처음에는 이태원에서 반미 샌드위치를 파는 푸드트럭을 차리는 것,그다음에는 스쿠버다이빙이나 서핑하는 섬에 가서 해변의 라면집 하는 것,그리고는 잠시 또 원 테이블 식당 이런 것도 꿈꿨던 것 같다.아직도 꿈만 꾸고 있다.
연말,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금요일은 회사를닫는 날이었는데, 목요일오후까지 나는 전쟁 중이었다.
도저히 일을 다 못 끝낼 것 같아 세명한테 일을 뿌려놨는데,그래도 점심 먹을 시간이웬 말이니,화장실 갈 틈도 나지 않았다.
많은 일이 그렇지만,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지만힘든 건 사람이다. 클라이언트, 상대 쪽 변호사,우리가 고용한 법정 변호사나 전문가들, 말 바꾸는 증인들, 아, 그리고 판사들도. 나쁜 클라이언트에도 종류가 있는 것 같다. 거짓말하거나 중요한 걸 얘기 안 하는 사기꾼형, 자기는 모르고 바쁘니까 보내준 자료로 알아서 하라는 무신경한 유형, 나중에 돌아와서 그런 얘기 안들었다 딴소리하는 발뺌형, 낼 돈 제때 안내는 짠돌이형 등등이 있는데, 나쁜 것은 하나뿐일 리가 없다. 안좋은 건 원래 한꺼번에 오는 법이니까. 너무나 당연하지만, 법원에다가 뭘 늦게 내는 건 좋을 때가거의없는데, 클라이언트가 court filing fee를 늦게 내서 제출이 늦어진 서류가 있었다. 기업고객들은 또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개인고객들과는 다르게 말하기 싫은 게있을 때가 많지. 저도 잘 압니다. 저도 그런 기업고객일 때가 있었거든요. 밍그적거리는, 숨기고 싶은 게 많았던 고객 하나가 돈을 늦게 내서, 법원이 준 기일 이틀 전에야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지난주였다. 그런데 하필 크리스마스 휴가 전날, 법원에서 서류와 함께 냈던 수수료가 잘못됐다고 제출한 서류가 돌아왔다. 영국의 법원은 human error가 너무 많은데, 원래 내 머릿속에 있던 수수료는 £A, 법원에 문의한 첫 번째 전화에서 안내받은 수수료는 £B, 돌아온 서류에 동봉된 법원의 안내 레터에는 £C! 이게 뭔가. 모두 조리 있게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Royal Courts of Justice
이미 기한이 지나버린 일이라아예 케이스를 진행 못하게 될 수도 있어서,그러면 그동안 들인 시간과 수만 파운드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갑자기 머리가 깜깜해져서 서류를 들고 법원에 뛰어갔다.By hand 제출은 또 처음!
법원의카운터 클로징 타임은 16:30
사무실에서 나가는데 이미 15:08
두둥! 예쁘고 웅장하고 미로 같은 Royal Courts of Justice에 도착하니 15:45 뒤로 이어진 후미진 Thomas More 빌딩에서 숨어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아내 제출하는 카운터에 가니 15:55 내 차례가 되니 16:15!
법원 내부. 출처 https://londonist.com
화가 난 변호사는 무섭다. 안그래도 바쁜 휴가 전날에 방해를 받으면 텐션은 더욱 올라간다. 담당하는 직원한테 따지고 원래 fee는 £A 임을 확인,원래 기한 내에 제출했으며너네가 잘못 안내한 거라고 컴플레인하고,결국 백오피스 시니어 매니저 불러다 원래 제출일로 filing 성공! 우여곡절 끝에 케이스 번호를 받고 나니 16:35. 하지만 내 두 시간이 이렇게 날아갔다. 내 hourly rate은 £241+VAT. 난데없이 두시간만에 80여만원을 쓴 우리 클라이언트가 행복할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 다른 tax 소송건의 법정 변호사(barrister)가 내 고객과 직접 연락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등 컨트롤이 안돼서 뭐라고 했더니, 나를 맹비난하는 이메일이 참조를 주렁주렁 달고 와있다. 거짓말하는 barrister,뒤통수치는 barrister는 전쟁이다. 불을 뿜어내는 이메일을 barrister에게, 그리고 이 사태에 대한 내 입장을 설명하는 이메일을 회사 파트너들에게 휘갈겨 보내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다저녁에 미팅이 있다.
늦은 저녁에 Marylebone에 있는 스시집에서 김 부장을 만났다. 출장 가서 이틀 동안 두 시간쯤 자고 일하다 어제 돌아온 남자 친구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인생이지만, 나도 참 시간이 없어서 크리스마스 선물도 아직 못 산건 올해가 처음이라고, 이게 맞냐고, 오도로와 시메사바에 사케를 먹으며 얘기했다. 미안해서 밥은 내가 샀다. 너무 힘들면 타히티 같은 데 가서 라면집이나 하자고, 우리한테 가능한 옵션인지 아닌지도 모를 위로를 나누고 나니 이렇게 오늘도 지나갔다. 이렇게 수습 변호사의 한해가 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