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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Jun 11. 2020

어떤 크리스마스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이야기

직장인으로 살면서 회사원 때려치우고 도망갈 로망 하나는 항상 품고 살았다. 처음에는 이태원에서 반미 샌드위치를 파는 푸드트럭을 차리는 것,  다음에는 스쿠버다이빙이나 서핑하는 섬에 가서 해변의 라면집 하는 것, 그리고는 잠시 또 원 테이블 식당 이런 것도 꿈꿨던 것 같다. 아직도 꿈만 꾸고 있다.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금요일은 회사를 닫는 날이었는데, 목요일 오후까지 나는 전쟁 중이었다.

저히 일을 다 못 끝낼 것 같아 세명한테 일을 뿌려놨는데, 그래도 점심 먹을 시간이 웬 말이니, 화장실 갈 틈도 나지 않았다.

많은 일이 그렇지만,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지만 힘든 건 사람이다. 클라이언트, 상대 쪽 변호사,우리가 고용한 법정 변호사나 전문가들, 말 바꾸는 증인들, 아, 그리고 판사들도. 나쁜 클라이언트에도 종류가 있는 것 같다. 거짓말하거나 중요한 걸 얘기 안 하는 사기꾼형, 자기는 모르고 바쁘니까 보내준 자료로 알아서 하라는 무신경한 유형, 나중에 돌아와서 그런 얘기 안들었다 딴소리하는 발뺌형,  제때 안내는 짠돌이형 등등이 있는데, 나쁜 것은 하나뿐일 리가 없다.  안좋은 건 원래 한꺼번에 오는 법이니까.
 
너무나 당연하지만, 법원에다가 뭘 늦게 내는 건 좋을 때가 거의 없는데, 클라이언트가 court filing fee를 늦게 내서 제출이 늦어진 서류가 있었다. 기업고객들은 또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개인고객들과는 다르게 말하기 싫은 게 있을 때가 많. 저도 잘 압니다. 저도 그런 기업고객일 때가 있었거든요. 밍그적거리는, 숨기고 싶은 게 많았던 고객 하나가 돈을 늦게 내서, 법원이 준 기일 이틀 전에야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지난주였다. 그런데 하필 크리스마스 휴가 전날, 법원에서 서류와 함께 냈던 수수료가 잘못됐다고 제출한 서류가 돌아왔다. 영국의 법원은 human error가 너무 많은데, 원래 내 머릿속에 있던 수수료는 £A, 법원에 문의한 첫 번째 전화에서 안내받은 수수료는 £B, 돌아온 서류에 동봉된 법원의 안내 레터에는 £C! 이게 뭔가. 모두 조리 있게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Royal Courts of Justice


이미 기한이 지나버린 일이라 아예 케이스를 진행 못하게 될 수도 있어서, 그러면 그동안 들인 시간과 수만 파운드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갑자기 머리가 깜깜해져서 서류를 들고 법원에 뛰어갔다. By hand 제출은 또 처음!


법원의 카운터 클로징 타임은 16:30

사무실에서 나가는데 이미 15:08

두둥!
예쁘고 웅장하고 미로 같은 Royal Courts of Justice에 도착하니 15:45
뒤로 이어진 후미진 Thomas More 빌딩에서
숨어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아내 제출하는 카운터에 가니 15:55
내 차례가 되니 16:15!

법원 내부. 출처 https://londonist.com

화가 난 변호사는 무섭다. 안그래도 바쁜 휴가 전날에 방해를 받으면 텐션은 더욱 올라간다. 담당하는 직원한테 따지고 원래 fee는 £A 임을 확인, 원래 기한 내에 제출했으며 너네가 잘못 안내한 거라고 컴플레인하고, 결국 백오피스 시니어 매니저 불러다 원래 제출일로 filing 성공! 우여곡절 끝에 케이스 번호를 받고 나니 16:35. 하지만 내 두 시간이 이렇게 날아갔다. 내 hourly rate은 £241+VAT. 난데없이 두시간만에 80여만원을 쓴 우리 클라이언트가 행복할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 다른 tax 소송건의 법정 변호사(barrister)가 내 고객과 직접 연락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등 컨트롤이 안돼서 뭐라고 했더니, 나를 맹비난하는 이메일이 참조를 주렁주렁 달고 와있다. 거짓말하는 barrister, 뒤통수치는 barrister는 전쟁이다. 불을 뿜어내는 이메일을 barrister에게, 그리고 이 사태에 대한 내 입장을 설명하는 이메일을 회사 파트너들에게 휘갈겨 보내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다저녁에 미팅이 있다.


늦은 저녁에 Marylebone에 있는 스시집에서 김 부장을 만났다. 출장 가서 이틀 동안 두 시간쯤 자고 일하다 어제 돌아온 남자 친구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인생이지만, 나도 참 시간이 없어서 크리스마스 선물도 아직 못 산건 올해가 처음이라고, 이게 맞냐고, 오도로와 시메사바에 사케를 먹으며 얘기했다. 미안해서 밥은 내가 샀다. 너무 힘들면 타히티 같은 데 가서 라면집이나 하자고, 우리한테 가능한 옵션인지 아닌지도 모를 위로를 나누고 나니 이렇게 오늘도 지나갔다. 이렇게 수습 변호사의 한해가 또 지나갔다.


수고했어 올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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