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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Jun 23. 2020

진정한 주부로 거듭나다

뉴질랜드에서 주부로 산다는 것은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각자 회사와 학교에 가고 나면 설거지와 밀린 빨래를 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계단이 있는 집을 청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거운 유선 청소기를 가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일은 집안일 중 제일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알레르기 비염을 앓고 있던 나와 아이들은 카펫에 먼지가 조금만 쌓여도 코와 목이 간지러워져서 게을리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청소 후 뽀드득거리고 반짝거리는 마룻바닥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온통 회색 카펫으로 덮인 우리 집 바닥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청소해도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청소를 마치고 나면 장을 보러 마트로 향했다. 내가 자주 들린 곳은 주로 다양한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Count down이나 Pak'n save 같은 대형 마트였다. 주차장이 널찍해서 주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트에 들어서면 입구에 꽃들이 제일 먼저 환하게 반겨주곤 했는데, 뉴질랜드인의 일상에 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꽃을 지나가면 형형색색 과일을 고를 수 있는 코너가 나온다. 과일 코너에는 종류별로 담을 수 있는 일회용 비닐 백이 비치되어있어서 원하는 수량만큼 담아 계산대로 가져가면 계산원이 무게를 측정해서 계산해 준다. 사과의 경우 품종이 워낙 다양해서 입맛에 맞는 사과를 찾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한국에서 먹던 사과와 가장 비슷한 맛을 가진 Royal Gala를 발견할 때 정말이지 기분이 좋았다. 뉴질랜드는 키위로도 유명한데 그린키위와 골드키위 중 단연 골드키위가, 가을이 되면 영롱한 주황빛을 띄는 단감도 일품이었다. 과일과 마찬가지로 야채와 채소도 원하는 양만큼 봉투에 담아 계산대에 들고 가면 계산원이 무게를 재어 계산해 준다.


해산물 코너에서는 주로 뉴질랜드산 연어나 그린홍합을 샀고 고기 코너에서는 뉴질랜드산 등심이나 갈비를 샀다. 뉴질랜드는 양고기로도 유명하다. 나는 냄새가 유별난 양고기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잘만 구우면 소고기보다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매일 도시락을 싸야 했다. 가끔 피자나 미트파이를 넣어주고 간식으로 작은 사이즈의 과일주스와 스낵을 넣어주었다.  주의해야 할 점은 땅콩 종류를 포함한 그 어떠한 음식도 학교에 가져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뉴질랜드에는 땅콩 성분이 들어간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하라는 공문이 종종 오기도 했다. 그래서 마트에서 아이들 간식을 살 때 주성분이 무엇인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재료가 들어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현지 마트에서 장을 보면 바로 한인마트로 이동했다. 한인마트에서는 주로 쌀과 라면, 고추장과 된장 등 각종 양념을 구입했다. 저녁에는 거의 한식을 먹었는데 된장국, 미역국, 콩나물국, 어묵국 등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한인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뉴질랜드에는 한국처럼 다양한 빵 가게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고 한국 스타일 빵을 파는 곳은 몇 군데 있었지만 가격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다. 


'낙농업이 발달한 뉴질랜드에서는 베이킹에 필요한 우유나 버터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고 베이킹 도구도 쉽게 구할 수 있잖아..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직접 빵을 만들어볼까?' 


어느새 우리 집 냉장고에는 버터와 우유, 달걀이 늘 채워져 있었고 주방 수납장 한 켠에는 베이킹에 필요한 도구가 하나둘씩 늘어만 갔다. 머핀 팬, 마들렌 팬, 타르트 팬, 파운드케이크 팬.. 종류별로 쌓여있는 팬들을 보며 흐뭇해했다.


빵을 만드는 과정은 예상외로 즐거웠고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다양한 빵을 만들기 위해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했고 근처 도서관에 가서 베이킹과 관련된 책을 뒤적뒤적하기도 했다. 열심히 만들어진 반죽이 뜨거운 오븐 속에 들어가 서서히 부푸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면 뿌듯했다. 베이킹을 하는 날이면 집 안 가득 빵 냄새가 진동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포근하고 따뜻해졌다. 아이들 생일이 되면 컵케이크를 구워서 반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기도 했고,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쿠키를 만들어 깜짝 선물로 주기도 했다. 어느새 내가 만든 빵과 쿠키는 가족에게 밥 말고도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또 다른 양식이 되어 주었다.


영화 ‘줄리앤 줄리아’에 나오는 줄리아처럼 이쁜 앞치마를 두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우아하게 빵을 굽고 싶었던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로망은 로망일 뿐 베이킹이 끝나면 언제나 어마어마한 뒷정리와 쌓인 설거지와 씨름을 해야 했지만, 빵 굽는 시간만큼은 지루하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활력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소한 기쁨까지 안겨주었다. 일상이 지루해지면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걸 베이킹을 시작하며 알게 되었다. 


블루베리 마들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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