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의 시간을 거스르기
가끔은 ‘평범함’이라는 단어에 실린 폭력성에 놀랄 때가 있다.
평범한 것에, 특별하지 않음에, 모가 나지 않음에 안도하며 만족했던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많았다. 여태껏 살아온 세월의 대부분이 그런 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내 몸속에서 돋아나는 가시 같은 뾰족함이 누군가에게는 ‘되바라짐’으로, ‘싸가지의 상실’로, ‘문제유발자’로 치부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무난하게, 시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생각을, 뜬구름 같은 생각으로부터 더욱 실체화된 무엇으로 곱씹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은 책들을 통해 나라는 ‘여성 개인’을 생각하게 된 것은 뒤늦은 행운일 수도, 열어서는 안 되었을 판도라의 상자를 과감히 열어젖힌 것인지도 모른다.
소리가 낭창낭창했던 여성, 아니 한 사람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리가 높아지는 순간 시끄럽게 울어대며 일명 집안을 망하게 하는 암탉이 되기도 하고, 순종적이지 못한 ‘할 말 못 참고 다 해 재끼는 되바라진 며느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여전히 그런 세대에 나는 끼어 살고 있다.
나의 말을 먼저 아끼고 나의 것을 우선하여 양보하고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이 가정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여기저기 빈 공간에 꿰맞춰지는 블록 조각 하나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부속화된 삶으로부터 실어(失語의) 그 시간들을 깨뜨리고 나오겠다는 결심은, 당장 쏟아질 매서운 눈초리와 날카로운 화살 같은 단어들을 받아내겠다는 의지이다.
많이 맞다 보면 흉살의 더께에 고통이 견딜만해 지듯이 또한 그러하리라 믿어보는 것이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얻는 것은 그 가짓수가 적으나 잃은 것은 수두룩하다.
나를 자리를 잃었고 또 나의 ‘존중’을 잃었다. 나의 사회적 능력치는 하나둘 소거되어 갔고 털 뽑힌 날개는 더 이상 흔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책임져줘야 할, 소위 ‘먹여 살려지고 있는 사람’으로 종종 치부된다. 이름을 가졌고 또 불리며 낭창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존재했던 한 여성의 본체는 결혼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통해 상실을 반복하며 점점 작아진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나 싶을 만큼의 가벼운 존재로 전락한, ‘기대어 사는 존재’로써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고 갇혀버리는 위험에 빠지기 십상이다.
오늘은 참고 참다 주저앉아 울고 마는 여자이고 싶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 눈치 보며 내 선에서 먼저 꿀꺽 참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에게 욕지거리 비슷하게 내뱉었다. 앞을 향해 바깥으로 내뱉은 것인데 왜 내 안으로 떨어져 박히는지 어리둥절했다. 아니! 이것에도 작용, 반작용의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것인가. 야속하게 내 마음도 불편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 뾰족한 언어들의 속내가 조금은 전달이 되었기를 바란다.
뮤리얼 루카이저가 한 말처럼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세계는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집 안의 천사’로서 기능하기를 감내한다고 해도 그 여자는 안으로 폭발하여 속으로 녹아내려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나라는 여성이 조금 더 뾰족해지기를 바란다. 가시 한두 개 내민 것에 스친다 해서 사망에 이르는 것은 아니나, 그것에 독을 바르는 결심을 하는 순간 또 바뀌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 소극적인 뾰족함이 불쑥불쑥 날아올라 분란을 일으킨다 해도 나는 나를 지지하고 싶다. 기꺼이 그 화살을 날려주겠다. 그래도 괜찮다고, 가끔은 많-이 뾰족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순식간에 화면전환 되듯 뒤집히는, ‘내 편이 남의 편이 되는’ 이 관계의 불편한 진실이 또 불쑥 드러난 밤이지만, 나는 글을 쓰니 괜찮아질 것이다.
뾰족해져도 충분히 괜찮고, 괜찮고, 또 괜찮을 것이다.
특히나 ‘실어의 시간’들을 거슬러 목소리를 찾아가는 일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