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즐기면 영어가 늘까? (7)

목적을 잊으면 목적이 달성되는 희한 얄궂은 일도 있네

by 윤슬

애초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의 목표이자 예상 전개 방향은 이랬다.

영어 콘텐츠를 즐기다 보니 영어 실력이 껑충 뛰어 있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계획과 실제가 딱 떨어지는 경우란 많지 않다.

나는 일단, 한국 드라마나 영화도 집중을 잘 못하는 편이고 퇴근 후에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볼 여력이 없다. (번아웃 상태로 겔겔 거릴 뿐)
그러다 보니 영어 콘텐츠를 즐기기는커녕 아예 보질 않았다. 혼자서 콘텐츠를 통해 영어를 학습하는 방법은 나와는 맞지 않는 방법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나마 영어의 끈을 조금이라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영준이와 선희 언니와의 영어 스터디를 통해서였는데, 그마저도 점차 친목성 모임으로 변해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인과 말하기 듣기를 많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내향적 성격과 외국인의 눈치를 보는 습성은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간 나는 돈이 없어서 영어를 못 한 게 아니라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마음 내려놓기라는 기술을 꽤나 터득하여 필요할 때마다 꺼내쓸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마음 내려놓기란 사실 목표 수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영어로 잘 말하기, 외국인과 잘 어울리기라는 목표에서 '잘'을 빼고, 그냥 말하고 싶을 때 말하기, 듣고 싶을 때는 그냥 듣기, 와 같이 '그냥'을 더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나'가 아닌 '타인'이 되려는 행동을 그만두는 것을 뜻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상황도 결국 '나'의 삶의 일부다. 그러니 온전히 '내'가 되는데 집중할 뿐이지, 구태여 외국인 앞이라고 더 잘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것을 연습하기 위해 대구의 DLXC라는 모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학교 원어민 교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모임으로 보드게임, 여행, 술자리 등의 활동을 포함해 언어 교환 활동을 2시간씩 하는 모임이.

매주 일요일마다 외국인 5명, 한국인 5명 정도가 카페에 모여 1시간은 한국어로 대화하고 1시간은 영어로 대화한다. (외국인도 낯설고 한국인도 낯선 총체적 난국을 못 견뎌했던 나는, 8월에 1번 다녀온 이후로 발길을 끊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러나 마음을 내려놓은 자에게 겁나는 일이란 없다. 배수진을 친 장군이 죽기를 각오하면 오히려 담대해지듯, 나도 '이게 내 마지막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용기백배하여 DLXC로 향했다.

눈. 치. 보. 지. 말. 자.
나. 만. 친. 해. 지. 려. 아. 양. 떨. 지. 말. 자.

1단계 마인드 세팅 일단 성공.

2단계 어금니를 깨물고 시크하게 테이블에 앉기도 성공.

3단계 끼어들고 싶으면 끼어들어 말하고, 할 말 없으면 굳이 쥐어짜 내지 않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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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도 한 단계 한 단계 거듭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졌고 '이래도 난 나를 사랑할 거야.'라는 뻗대기도 강해졌다. 다행히 예전만큼 불안하지는 않았다. '난 너희들에게 맞추지 않을 거야.'라는 시크란 마음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뒤풀이 저녁 식사까지 함께 하고 돌아올 정도였다.(커버 사진이 뒤풀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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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단어를 더 외우거나 문장을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영어를 사용하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머물 수 있는 담담한 마음가짐은 만들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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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옛 성현이 일체유심조, 즉 마음 하나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하였을까?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 내가 DLXC 모임에 참여한 횟수는 3번이며, 그중 번외 모임으로 가을 억새밭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내 인생에 이런 날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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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잊은 채, 오로지 외국인 앞에서도 자존감 잃지 않기 연습을 하러 다녀왔는데, 희한하게 영어 모임에 지속적으로 나가게 됨으로써 꾸준한 영어 공부라는 목적이 달성되는 것 같 이 상황은 무엇?

그러므로 이번 화의 결론,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 영어 공부도 따라온다!
목적을 버리면 목적이 이루어지는 희한 얄궂은 일도 있다!


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영준이와 선희 언니와의 스터디는 점차로 유야무야 되고, 당초 기획했던 영어 동화 대신 일상 넋두리를 영준이와 영어로 진행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8)에서 써 내려갈 예정이다.

ㅡ DLXC 친구들과 억새밭 나들이 ㅡ

ㅡ DLXC 모임 뒤풀이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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