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정혜 Oct 30. 2022

'시작'에 관한 사색-두려움이 나를 부를 때 하는 말

  내 나이는 서른 둘. 결혼은 아직. 기억에 남는 직전 연애는 한 번이고, 그 사람은 올해 결혼을 했다, 다른 사람과. 취업을 위해 뜨겁게 고군분투하던 때 서로의 자존을 채워주며 만났지만 결국은 각자 삶이었다. 다시 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화사한 사진 속 두 남녀의 모습을 메신저로 훔쳐보고 있자니 술도 못하면서 맥주를 들이붓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문득, 두려워졌던 거다. 삶이 주는 착각에 속고 있었다는 사실이. 삶은 가족과 연인들, 친구들을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처럼 여기도록 만들어 놓고는 실은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각자의 십자가를 진 채 외따로 걸어가게끔 뒤통수를 친다. 지켜봐 줄 순 있어도 대신 겪어줄 수는 없는 인간의 삶이란, 고독 그 자체다…. 

  라고 생각하며 주섬주섬 노래를 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라마에서 볼 법한 장면처럼 때마침 라디오에선 이별 노래가 울려 퍼졌고, 다행히 펑펑 울게 하지는 않았다. 가볍게 흥얼거릴 만한 멜로디와 리듬에, 가사만 다소 서글펐을 뿐.

  “나 이제 다른 사람 만나러 가요. 너 없인 안 될 줄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 또 다시 떨려 와요.” 

  노래 속 남자의 담담한 고백은 마치, 결혼을 앞둔 전 남자친구의 전언, 혹은 나 역시 그에게 언젠가 보내게 될 메시지처럼 들렸다. 아니, 것보단, 죽음을 향해 자기 보따리 하나씩 둘러 매고 훌훌 걸어가는 우리 생의 개별성을 더없이 잘 드러낸 경구처럼 생경했다. 노래 말미에서 ‘나 없이도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 살길 바란다’는 가사가 내 몸에 단단히 또아리를 감고 놓아주지 않을 때, 나는 다짐했다. 그래,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살 만한, 무언가를 시작하기로. 이 불편하고 곤란한 상황을 상쇄할 만한 새로움을 선택해 보기로.

  내가 선택한 그 새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내 여동생 이야기를 잠시 해야 할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패션 감각이 뛰어나 꾸민 듯 안 꾸민 듯 세련미가 넘쳤던 내 동생은 어느 날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얼굴로 날 노려보며 외쳤다. ‘나 중학교 1학년 때, 쟤 옷 입은 거 보라며 놀린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나한테 옷은 목숨보다 소중해’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내 옷 몰래 입지 말라'고. 몰랐다. 동생이 빼어난 패션 감각을 계발하게 된 계기에 그런 뼈 아픈 사연이 있은 줄은. 알게 되었다. 시작은 반드시 순진하고 해맑은 호기심에서만 싹트는 것은 아님을.

  이제 이 이야기는 결말을 목전에 두고 있고 그건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먼저 서른 둘의 나는 어제 먹은 점심 메뉴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고, 방금 했던 말도 잘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둘의 나는 지금 초고령 수강생으로서 입술에서 “피이쓰!”, “에이! 요!”를 내뱉으며 ‘랩’이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건들거리고 꿀렁거리는, 젊음의 최전선에 있는 장르를… 목에 감은 번쩍이는 금빛 체인만큼이나 넘치는 자신감으로 무장해야 하는 장르를, 나는 내 삼십 대의 새로운 취미 생활로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앞서 말한 내 직전 남자친구의 결혼 소식이고, 그래서 ‘싸이’의 ‘벌써 이렇게’라는 노래를 무릎을 끌어안고 들었던 일이다. 다음 날 나는 “이 랩 저도 따라 부를 수 있을까요?”라며 음악 학원에 들이댔던 것이다, 꽤나 악에 받친 얼굴로.

  누군가의 시작이 아픔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는 이미 어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작이 데려다 놓는 미지의 세계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조차 이해한다면 그는 어느덧 자유로운 인생의 항해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매일 겪어보지 못한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 이 때에, 고통과 신음이 우리를 밀어다 놓는 출발선 앞에 서서 두려움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이렇게 거들먹거려 보고 싶다. 

  새로움은 생각보다 괜찮은 곳으로 우릴 데려다 놓을 거라고. 그러니 절대 쫄고 있지 만은 않을 거라고.

이전 01화 '나'에 관한 사색 - 나는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