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정혜 Oct 30. 2022

'거리'에 관한 사색 - 나의 첫 00을 기리며

  가끔 여자 사람들 중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혹은 초면에라도- 팔짱을 턱턱 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난 사춘기 소년처럼 얼음이 되어 뻣뻣해져 버리고 만다. 가족끼리도 잘 끼지 않는 팔짱인데 가족 아닌 사람과 끼는 것은 너무나도 어색한 일. 게다가 팔짱을 낀 우리 두 사람 앞으로, 자전거 탄 아이들 혹은 큰 기둥 같은 장애물을 만나면, 둘이서 혼연일체가 되어 꽃게걸음으로 하낫, 둘, 하낫, 둘 걸어가야 할지, 터프하게 혹은 스무스하게 팔짱을 풀어야 하는지도 헷갈리고 진땀이 난다. 그래서 때로는 가방이라도 하나 옆구리에 끼거나 손에 잡고 있는 게 위안이 된다. 불편한 상황 방지 차원이랄까...

 5년 전쯤 내 작은 자취방에서 여름을 함께 보낸 그에게 나도 일종의 팔짱 같은 불편함이었을까 싶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싱그러움 그 자체로 날 반겨주던 그는 내게 더운 날 생수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가 외로울까 싶어 자주자주 말 걸어주고 목이 마를까 싶어 시원한 물도 많이 떠다 바쳤다. 가끔 비실비실하고 축축 쳐진 모습이 신경쓰여 건강해지라고 좋은 영양제도 선물했다. 그런 행동들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 거라고, 우리 사이는 제법 괜찮은 편이라고 철썩 같이 믿으며...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어느 주말을 고향에서 보내고 돌아와보니 웬걸 그는 생판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날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을렀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새까맣게 타버린 피부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오그라든 몸으로 말이 없었다. 그는 40도가 넘는 햇빛에 완전히 고사해 있었다.

  나의 첫 반려 식물 테이블야자는 그렇게 비참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내 잘못이었다. 하필이면 기온이 관측 이래 최고로 치달았던 주말, 햇볕 쨍한 창가에 그를 내버려두고 이틀이나 집을 비우다니... 그런데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직사광선을 조심해야 했었을 뿐더러 물도 자주 주면 안 됐었다. 그것 역시 고사의 한 원인이 된다는 것. 식물이라면 물, 바람, 빛이 무조건 유익인 줄로만 알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그 아이가 싫어하는 짓들만 족족 다 골라서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호감을 가졌던 남자 동기 L이 겹쳐졌다. 언제나 똑같은 빨간 체크무늬 셔츠에, 무심한 듯 귀에 꽂은 이어폰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던 L. 무슨 노래를 들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던 나머지 어느 날 앞뒤로 앉은 강의실에서 난 L의 등을 쿡쿡 찔렀다. 이것저것 말을 걸었고 관심을 가졌으며 친해지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결과적으로 우린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지만 훗날 그의 발언은 큰 충격이었다. 자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학창시절에도 말 걸고 귀찮게 개입하는 선생님들, 딱 싫었다며, 관심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는 선생님들은 질색이랬다. 아마도 어린 시절 엄청나게 과보호했던 엄마 영향일 거란 말도 했다. 그때 나의 벙찜이란... 라디오 사연 중에 이런 것과 비슷하려나. 면 요리를 좋아하는 부인이 30년 간 주말마다 남편과 국수를 나눠먹으며 동질감과 기쁨을 느꼈는데, 어느 날 남편의 폭탄고백, '사실 나 별로 국수 안 좋아해. 당신이 만들어서 그냥 먹었던 거야.' 라는 말에 오만 배신감이 다 들었다는...

  이쯤 되면 내 불쌍한 테이블야자는 햇빛과 물 때문에 고사한 게 아니라, 나의 오만하고 일방적인 관계 맺기로 말라버린 거라 말해야 한다. 내가 팔짱을 싫어하듯이, 누군가마다 관계 맺기에 필요한 정도와 속도, 거리감을 좁혀가는 방식이 다 다른 것을... 5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몰랐다. 

  다음 번에 식물을 키운다면, 좀 더 세심하게 그의 특성을 파악하고 조심스레 처신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이 글은 불쌍하게 죽은 내 테이블야자 앞에 바쳐야 할 것 같다. 

이전 03화 '부모'에 관한 사색 -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